편협한 견해로 세상을 휘두르던 25년 전 나를 위해
"율성휘 님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편견 없애는 일이 진짜 어려운데……"
독서모임에서 열띤 토론을 끝내고 준비된 간식을 먹으며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오해와 편견이었다. 각자 주제에 관한 책을 가져와 함께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참여자분 중 '편견을 없애는 나만의 비법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셨다. 서로가 갖고 있는 편견을 타파(?)하기 좋은 노하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내가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 '편견 노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이든 내가 처음 판단한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적습니다. 그 이후 편견이 있는 뉘양스, 단어가 있다면 빨간색 펜으로 찍찍 긋고 왜 그 말을 지웠는지 따로 옮겨 적고 있습니다. 덕분에 편견에 대해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어요.'라는 그 말에 감동을 받은 분이 조심스레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몰라 어중간한 자세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분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이 글을 혹 보신다면 충격받으실 수 있겠다만, 나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본 사람이다. 남들이 나를 보는 편견과 내가 남을 바라보는 편견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꾹꾹 내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쌓인 편견에 관한 데이터와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력(?)을 살려 25년 차에는 프로 편견꾼이 되었다.
객관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며 세상을, 남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평가했다. 그냥 편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능력도 없고 못난 사람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 확신했다. 친구나 가족들이 '너는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해주곤 했지만 단 1퍼센트도 신뢰하지 않았다. 좋은 말은 귀담아 듣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나는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인데 지들이(?) 나의 어떤 면을 보고? 나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거 아냐?'라는 말도 안 되는 시선을 갖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놈의 편견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아졌다. 오죽하면 나의 상사가 다른 상사에게 나를 소개할 때 "편견과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사원이다"라고 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맨날 부딪치며 싸우다보니 무의미한 감정소모를 끝내고 싶었다. 이러다 진짜 내가 죽겠구나 싶어 부적절한 성격,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불만 가득한 시선을 고쳐보고자 쓰게 된 것이 바로 편견 노트였다.
지금도 노트를 쓰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편견이 그득하게 찬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꾸준히 노력하고 의식해야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편협한 견해와 감정들을 씻어내지 못했다. 이따금 객관적인 판단은 고사하고 날이 선 편견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내가 맞아!"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나는 아마 평생 내가 갖고 있는 편견과 싸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치만 예전과 다르게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편견 노트를 쓰면서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그게 얼마나 오만방자한 시각이었는지 자기 객관화가 충분히 된 상태라(..)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고칠 수 있다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도 두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를 인지했다는 믿음이라는 견고한 땅을 발판 삼아 도약할 자신이 있다. 내가 나를 믿고 의지하니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노트 덕분이다.
편견 노트를 시행해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지는 못하지만, 살면서 한번쯤은 해볼만 하다고 말하고 싶다.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사건이 있다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다면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사건을 짧게라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보고 빨간펜으로 편견이라 생각하는 단어들을 지워보는 것을 권한다. 생각보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게(?) 꽤 재밌는 일이라 감히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