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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Jun 23. 2021

어메이징 아메리칸 라이프

빛 좋은 개살구

7:05 am

알람보다 5분 일찍 눈을 떴다.


화장실과 맞닿은 벽면 너머로 룸메이트가 샤워기를 트는 소리가 들려온다. 출근 시간이 비슷한 우리 둘은 아침마다 화장실 사용하는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눈치를 본다. 사실, 눈치는 나만 보는 것 같다. 다행히 자기 전 샤워를 하는 습관을 가진 나는 화장실을 오래 쓰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가끔씩 아침잠을 설친 기분이 안 좋은 날은 별 일도 아닌 것으로 짜증이 솟구친다. 눈치 없이 아침부터 오래 샤워를 한다던지 해서 볼일을 보고 싶은데 방에서 참아야 하는 경우 등등.


얼굴 한가득 인상을 쓰고 주방으로 향한다. 코딱지 만한 아파트에 4명이 살려니 가끔 사람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주방 옆에 위치한 다른 방의 룸메이트도 일찍 일어나 있다. 그나마 세명의 룸메이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라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한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한 컵 마시고 얼굴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다. 7시 45분 전철을 타려면 서둘러야 한다. 대충 씻고 화장 따위는 과감히 포기한 채 집을 나선다. 은행에 출근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옷은 대충 격식만 갖춰 입었다. 어쩐지 다행이다. 남직원들 같이 정장을 꼭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7:46 am 열차가 서서히 승강장 입구로 진입한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5월의 아침은 쌀쌀했다. 그렇게 멍 때리며 열차가 다가오는 것을 본다. 스크린 도어가 없는 뉴욕의 전철은 까딱하면 열차에 치이거나 선로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괜한 마음에 안전선 밖으로 멀찌감치 물러난다.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들어왔던 열차 괴담. 어떤 정신병자가 뒤에서 민 시민이 하필 승강장으로 집입 하던 열차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는 그 끔찍한 사건... 뜬금없이 가수 이승환 뮤직 비디오에 나왔다던 조종실 안 귀신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그렇게 잡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 열차는 어느새 내 앞까지 와 있었고 승객들이 밀물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재수 없으면 열차를 놓칠 수도 있으니 재빨리 올라탄다. 이래저래 사람들을 밀치고 안쪽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콩나무 시루 속에서 한숨 돌린다.


전철역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사무실이다. 8시 30분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차장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것이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다. 차장. 내 직속은 황 차장이다. 여긴 미국 뉴욕이고 나는 뉴욕에 있는 은행에서 근무를 하지만 Associate, VP, Director 대신 사원, 대리, 과장, 차장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일한다. 왜냐하면 한국계 은행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있지만 업무의 85% 이상을 한국어로 소통했다.


8:25 am 뒷자리 차장님께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황차장은 매일 나보다 먼저 출근해서 나보다 늦게 퇴근한다. 눈치  본지는 오래됐다. 처음에는   바를 몰랐지만 솔직히 평생 다니려고 입사한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이미  내려놓았다. 결정적으로 여긴 미국. 아무리 한국계 은행이라고 한들  미국식으로  째라였다. 분명 뭔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데 황차장은 나에게  번도 출퇴근 시간으로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황차장도  눈치를 조금 보는  같긴 하다.


8:55 am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한 데일리 리포트 작성이 20분 만에 끝났다. 입사해서 한 시간 걸리던 일도 이제는 손에 익숙하니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매일 아침 하는 업무를 끝내고 나니 할 일이 없다. 할 일을 찾으면야 있겠지만 사실 찾아서 해야 할 만큼 당장 급한일도 금방 끝낼 수 일도 없었다. 아침 9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오늘 할 일을 다 했다. 이렇게 모니터 앞에 멍 때리고 앉아 차장님이 혹시라도 시키는 일이 있으면 그때 하면 되었다.


어떤 이는 이런 나를 보고 월급 루팡 혹은 팔자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일 안 하고 돈 받아가는 감은 없지 않지만 직장생활 몇 년 해 본 사람은 안다. 하루 종일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사람 피 말리는 짓인지를... 일단 일이 없다고 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책상 칸막이 넘어 힐끔힐끔 감시하는 차장 때문에 대놓고 인터넷 서핑을 즐 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이 없는데 일 하는 척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엄한 워드 파일을 열고 타자를 친다. 일기를 쓰거나 차장 욕을 적었다. 이 은행 사무실은 유난히 더 조용하다. 사람들이 말을 안 한다. 다들 메신저로만 이야기하며 전화도 속삭이며 통화한다. 종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니 앞에서 타자라도 안 치면 얘가 뭐하나 하고 황차장이 감시할게 뻔하다. 그렇게 그날도 의미 없는 글자들을 적어나가며 퇴근시간만 학수고대하였다.


퇴사는 매일 생각했다. 쥐꼬리 월급도 월급이지만 근무 환경이 맘에 들지 않았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조직 생활이 하기 싫어서 탈출한 한국이었는데 한국을 벗어나 한국에 안착했다. 내 동료는 Jennifer와 David가 아니라 황차장, 김 과장, 이 아무개 씨었다. 무한 상사에 취직해도 이것보다 나았겠다 싶었다. 퇴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직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있는 것이라곤 회사 경력뿐이니 뭐든 할 수 있었을 테지만 회사에 다니기가 싫었다. 뭔가 활동적이고 재미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퇴근까지 남은 시간은 점심시간 제외하고 7시간. 하는 것이 없으니 유난히 배가 고프고 유난히 졸리다. 그렇게 쟁여둔 과자를 서랍에서 꺼낸다. 흡사 시험 기간 대학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고요함에 나는 가위로 살며시 봉지를 뜯어 과자를 녹여 먹었다.


1: 55 pm 점심시간이 끝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니! 정말 매일매일 시간이 안 간다. 할 것이 없던 나는 고객한테 보낼 대출 이자 계산서 작성을 미리 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핸드폰을 슬쩍 꺼내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들의 페이지를 염탐하다 우연히 '그놈'의 전 여자 친구 인스타를 발견했다. 다행히 공개이다. 그녀는 아직도 '그놈'과 함께 찍은 사진을 지우지 않았다. 천사들이 광고하는 미국의 유명 속옷 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는 아담한 체구지만 야무져 보인다. 그래서 더 얄밉다. 그녀는 해외 출장도 많이 다니는 것 같고, 다니는 회사도 이 한국계 은행이랑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재미나 보인다. 급 자괴감이 들었다. 난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LinkedIn(링크드인)에 접속했다. (미국 잡코리아 같은 사이트라 생각하면 된다.) 퇴사는 사실 입사하고 일주일 만에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어느덧 흘러 일 년 반이 되었고, 나는 그동안 탈출하지 못했다. 사실, 시도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 무언가 시도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검색창에 H사 인사과 담당이라 (HR Manager)라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무수히 쏟아지는 인사과 담당자들의 프로필. 하나둘씩 내려가며 뉴욕 내로 검색 결과를 좁혔다. 열어 놨던 워드 창에 인사말을 적기 시작했다.


"Hello. My name is Lena Kim.

I found your information on LinkedIn. I would like to express my interset in your company..."


이력서에 첨부하는 커버레터 형식으로 간단하게 적었다. 형식을 제대로 갖추어 쓴 것은 아니고 친구한테 이메일 쓰듯이 살짝 캐주얼한 감을 더했다. 너무 형식을 갖추면 로봇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였다. 예의는 있되 간절함을 표한하고 싶었다. 나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적기로 했다.


"I have applied to your company many times via your career page. However, not once have I heard from you guys. I feel so lost and desperate here so would like to ask you if there is a better way to approach...." (그간 당신의 구인 페이지를 통해 많이 지원했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너무 절망적이고 간절하다. 그래서 혹시나 좀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솔직히 인사 담당자한테 저렇게 메시지를 쓴다는 것이 조금 찌질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가 물불을 가릴 입장도 아닐뿐더러, 저렇게 쓴다한들 손해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복붙으로 약 15명 정도의 인사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희망을 담아 접은 종이학이 진짜 학이 되어 내 손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며 그렇게 인터넷의 어떤 미지의 공간으로 나의 절박함을 보내 버렸다. 연락이 오면 오는 것이고 오지 않으면 뭐... 그만이지 싶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오후 3시 반쯤 되었다. 여전히 할 일은 없었고 퇴근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뭔가 뒤에서 황차장이 노려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지지만,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대출 이자 계산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1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을 엿가락 늘이듯이 2시간으로 늘려하려니 내 기분도 엿같았다. 퇴사가 너무 하고 싶다.


5:30 pm 드디어 퇴근 시간. 오늘도 하는 것 없이 힘들기만 한 나의 하루. 5:30분 땡 하자마자 일어나면 너무 눈치가 보이니 5시 38분 정도까지 가방을 챙기고 기다린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퇴근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자연스레 가방을 들고 황차장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오늘도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잘 가라는 황차장의 목소리를 뒤로 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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