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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Aug 28. 2021

누구도 내가 마흔이 될 것이라 말해 주지 않았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목표 대학을 가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만을 생각하고 살던 나는 어느 날 스무 살이 되었다. 목표했던 대학은 가지 못했고 실패감을 맛보기도 전에 남들이 성인이라 하니 그런 줄 알고 대학 4년 열심히 다녔다. 하지만 졸업하고 나니 막막했다. 하고 싶은 것은 딱히 없지만 미국에 가서 살아야겠다 생각이 들어 무작정 떠나 잠깐이지만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돌아보면 갑작스러운 늦바람에 날 새는지 모르는 내일 없는 베짱이 라이프였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덧 서른이 되었다.


이십 대 시절, 서른은 큰 숫자였다.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해야 할까? 나보다 먼저 서른을 맞이한 언니, 오빠들은 지나 보니 삼십 대가 더 좋더라, 이십 대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며 어쩐지 여유로운 모습의 ‘으른’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의 삼십 대를 상상하곤 했다. 서른 즈음이면 직업적으로 안정적이고, 돈도 벌만큼 벌면서, 부지런을 떨었다면 결혼해서 애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대충 그런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정작 서른 살 생일날엔 덤덤했다. 앞 숫자가 바뀌었다 한들 큰 타격은 없었다. 거울을 봐도 나는 아직 이십 대 같았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주변 친구들도 고만고만, 다들 비슷한 사정으로 힘든 직장 생활을 토로하는 것이 유일하게 변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예전과 같이 유쾌한 대화를 나눴고, 여전히 만나서 술을 많이 마셔도 밤은 짧기만 했다. 우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눈앞에 마흔이 기다리고 있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 하나 나에게 ‘너도 마흔이 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지 않았다. 주변의 언니, 오빠들은 소리 소문 없이 침묵으로 마흔의 문턱을 넘었다. 모두들 마흔이라는 나이가 탐탁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서른이 되었을 때 온갖 요란을 떤 후라 이번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일까? 여하튼 나는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이제 내 차례다.


마흔의 징조

내 차례가 왔음을 슬슬 감지한 데는 주변에서 보이던 이상 징후(?)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연장자가 되었다. 새로운 사교 모임, 새로운 직장, 취미반 클래스를 가면 다들 나보다 적게는 한 두 살, 많게는 열 살 까지 어렸다. 내 나이를 말하는 게 부끄러워졌고, 나이보다 동안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기쁨보다는 다시 한번 ‘나이가 많음’에 어깨가 무거워질 뿐이었다.


이 뿐이 아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아니, 일 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다들 결혼, 출산, 육아에 정신을 못 차린다. 비혼과 기혼의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공통분모를 잃었고, 그렇게 만남은 뜸해졌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나기라도 하면, 건강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는다는 것 또한 이전과 다른 점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더니 간이 안 좋네, 자궁에 혹이 생겼네부터, 운동을 하고 싶은데 체력이 안된다며 앓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이십 대 때, 화장품과 새로 유행하는 브랜드의 옷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마흔을 바라보며 간에 좋은 영양제와 흡수율 높은 마그네슘 정보 공유에 열혈이다.


마흔, 왜 두렵나?

마흔에 대한 이미지는 대강 이렇다. 일단, 불혹, 중년 등 뭔가 숙성된 느낌의 별명이 따라붙는다. 중년의 위기도 보통 보면 사십 대가 시작이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로만 들어왔던 어마 무시한 위기가 도대체 뭔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마흔쯤 그러니까 내가 이십 대 중후반 즈음되던 시절의 모습을 회상해 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의 청춘의 한가운데서 부모님이 겪었을 중년의 위기 따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내가 인생의 화려한 여름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부모님은 선선해지는 가을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오래간만에 찾아온 부모님 댁 책장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나이를 속이는 나이: 만들어진 시간, 중년에 관한 오해와 진실”


이 책을 샀을 엄마의 당시 심정이 공감이 가면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렇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뉴욕 타임스 기자인 작가가 사십에 들어서며 느낀 점을 바탕으로 중년이라는 나이가 사실은 서구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의 시간 개념이며, 기업과 마케팅 회사들의 지휘 아래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나눈 연령층일 뿐이라는 주장을 꽤나 근거 있는 팩트로 뒷받침한 책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 사회 중년에 투영된 부정적인 부분은 사실상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소비 파워가 강한 중년 소비자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광고 회사들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열등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특이하게도 중년의 여자와 남자를 일컫는 ‘아줌마’와 ‘아저씨’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잘 알고 있는 ‘아줌마’와 ‘아저씨’의 이미지도 사실 서구권 문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단어의 뜻 만 보면 그냥 나이가 많은 남, 녀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뭔가 억척스러움이 묻어나는 단어이기에 우리는 ‘아줌마’, ‘아저씨’(요즘은 아재)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 한다.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유독 나이에 민감한 뿌리 깊은 유교의 나라에서 중년이란 노인으로써 공경받기에는 부족하지만 젊지는 않기에 선망받지도 않는 ‘끼인 세대 느낌이다. 그래서 인가 나는 마흔이라는 나이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


생각을 바꾸면 될까?

오랜 외국 생활로 나이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가 마흔을 앞두고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본인도 적잖게 당황스럽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며 쳐 저가는 입꼬리를 찢어져라 위로 당겨보지만 예전만 못한 피부 탄력에 탄식만 나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백세를 사는 세상에 사십이라 해봐야 아직 반 조금 못 채운 정도이다. 인생 반도 못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치 인생 다 산 사람 마냥 삶에 대해 절망적일 필요가 없다.


특히, 한 세기 이전의 마흔의 모습과 현재의 마흔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공유, 한예슬, 전지현과 같은 연예인만 봐도 과거 사십 대 연예인과 판이하게 다르지 않은가? (전원일기 첫 출연 당시 일용엄마 역할의 김수미 님 나이가 32살이었다고 한다.)


21세기의 마흔은 어쩌면 새로운 서른 살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마흔을 좀 더 근사한 내 미래를 위한 준비의 시작으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삶에 찌들어 건강과 젊음을 잃는 나이가 아닌 여유와 풍요를 즐기고 앞으로 다가올 건강한 미래를 위한 도약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PT 20회도 끊었다. 운동은 깨작깨작하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배워 근투자를 해야겠다 싶었다. 운동을 배우니 역시 활력이 나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마흔을 생각해 보지 않은 이들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은 늙고 결국 죽는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마흔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찬란한 이십 대와 세련된 삼십 대 속에서 아직 마흔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여러분, 마흔은 생각보다 빨리 옵니다. 서른이 되었다고 절망하는 분들 마흔은 더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흔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이삼십 대에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마흔이 되면 좀 차분해집니다. 어차피 마흔이면 살만큼 살았다 싶거든요. 하지만 아직 의욕을 버릴 나이는 아닌 듯싶습니다. 준비만 잘하면, 열심히 이삼십 대를 살아왔다면 마흔은 어쩌면 인생의 황금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른이 끝이 아닙니다. 마흔이 인생 제2장의 서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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