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집 소년 (연재소설 #8)
다방집 소년 8
-(19금 소재가 있어 읽는데 주의를 요합니다.)
아시안 게임이 조용히 폐막하고 거의 한 달이 지나가 버렸다. 11월의 첫째 토요일이었다. 아무리 남부 지방이라지만 D시의 날씨는 제법 초겨울에 진입했고 D시 특유의 바닷가 칼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최종 성적은 무수한 판정시비에도 불구하고 중공에 이어 금메달 하나 차이로 2위에 머물렀다. 대신 경제대국 일본을 체육으로 압도했다며 여러 신문들이 대서특필을 했다.
대한민국 12대 대통령인 지금의 민머리 대통령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병원의 대통령 주치의는 그제 기자회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고 간혹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등 회복의 전조 증상이 보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나서 미국의 허락을 받아 광주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참히 학살했기에 천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다방집에 은밀히 떠돌았다. 더군다나 현 대통령의 혼수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독재 권력 구심점이 사라져서 그랬는지 전국적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과 시민의 데모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지난 10월 28일 건국대 시위에서 무려 1000여 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구속되었다. 현 대통령이 식물인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독재 정권의 대국민 탄압은 오히려 교묘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대통령 하나 저 세상으로 보낸다고 독재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문 사설들은 일제히 폭력 시위와 용공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사설을 내뱉었었고 무슨 일인지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북한의 금강산댐을 이용한 수공(水攻) 시 국회 의사당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TV 뉴스 보도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국회의사당 화면을 보여주며 물이 잠기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내가 태어난 서울인데 저런 일이 있어서 될 일인가 싶은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나저나 하필 나 때문에 세상이 더욱더 어지럽게 돌아가나 싶었지만, 다방집 앞 카바레의 성업 덕분에 다방집의 토요일 저녁은 요즘 들어 더욱더 바빠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다방집 주인인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미스 나 누나는 두 달째 우리 다방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 후 다방집 매상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덕분에 4분기 내 등록금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조금 기뻤다. 엄마는 미스 나 누나를 철썩 같이 믿는지 요즘 부쩍 외출이 잦아졌다. 나는 미스 나 누나의 부탁으로 이날 저녁에만 여러 번 손님들의 담배 심부름을 했다. 요즘은 88 담배 심부름이 제일 많았다.
한 달 전에 공사를 해 만든 카운터 옆 다방집 새방에는 그럴싸한 노름판이 주말마다 벌어졌다. 역시나 상냥하고 오동통한 체격의 동네 청년이자 어엿한 미스 나 누나의 애인 행세를 하는 필수 씨가 노름판 사람을 모았다.
필수 씨의 친구들인 사람만 좋은 정씨, 돈에는 칼 같은 조씨, 생양아치라 불리는 미친개 홍씨, 그리고 홍씨의 친구이자 내가 늘 아슬아슬하게 바라보는 음흉한 배씨가 한 멤버가 되어 훌라나 세븐 오디를 치고는 했다.
다방집 제일 구석에 앉아 있는 제비족 미스터 민은 역시나 백구두의 광을 지나치게 낸 나머지 지하 다방집 구석을 정말이지 제일 환하게 밝히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역시나 오늘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서 택시를 대절해 부리나케 달려오신 자유부인들을 상대해 지르박 댄스란란 무엇인지 열심히 강의하고 있었다.
“나 오늘,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 무심한 밤새 소리 구슬피 들려….”
담배 심부름을 다녀와 보니, 주말의 TV에서는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며 <오늘 밤>을 부르는 신인 댄스 가수 김완선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TV 화면 가득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보였다. 뭐랄까? 원초적 본능이 자극이 되고 있었다.
88 담배를 사 오라는 손님의 담배 심부름을 마치고 김완선의 춤에 눈이 팔린 채 내실로 향하는데 누군가 내 엉덩이를 툭 쳤다. 깜짝 놀란 내가 손님 쪽을 보자 트랜스젠더 스트립댄서인 엘라가 나를 향해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왼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트랜스젠더 스트립댄서 엘라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도 오랜만이었다. 한편으로는 반갑기까지 했다. 예의 근방에서는 보려야 볼 수 없는 화려한 무대 화장을 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향수 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어머! 우리 다방집 도련님! 안 보는 새 훌쩍 다 컸네! 나한테 장가와도 되겠어!!! 호호호!!”
웃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렬한 그녀의 욕구가 아주 새빨갛게 느껴졌다. 어느새 나는 그녀가 사는 집 현관에 가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방을 가면서 본 작은 거실에는 붉은빛을 띤 은은한 조명이 흘렀고 아기자기한 인형과 여성스러운 장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방 방문은 없었고 구슬로 된 커튼이 이 집 특유의 은은한 조명에 반짝이며 방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구슬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 찬 방인데, 그에 어울리지 않는 상당히 크고 럭셔리한 침대가 있었다. 엘라라고 불리는 그녀가 내손을 침대로 잡아당겼다. 웬일인지 그 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 그녀와 키스를 했다. 시나브로 그녀가 나의 몸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몰려왔다. 결국 그녀가 나의 거시기를 새빨간 혀로 희롱했다. 참을 수 없던 나는 얕고 나지막이 ‘갸르랑’ 거리는 고양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고양이 소리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가 내 위에 올라갔다. 도저히 어쩔 도리 없는 절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 모든 것은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마음의 일이다. 어서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 이제 그만!!!
“아이! 참! 왜 그러세요.”
내 얼굴이 새빨개져 가지고는 그런 말을 내뱉은 게 약간 미안해져서 엘라에게 그나마 살짝이라도 눈인사를 하려고 했다. 예의 같은 일을 하는 후배들과 박장대소하는 통에 그녀가 또 고개를 푹 숙이자 화려한 무스탕 안에 입은 매우 헐렁한 그녀의 라운드 티 속으로 지난번처럼 그녀의 가슴이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였다. ‘아! 놔! 지금은 현실인데 왜 또? 저런 게 보이나?’싶어 도망치 듯 내실 옆 쪽방으로 들어갔다.
시도 때도 없이 서대는 거시기 때문에 고뇌하는 무성애자의 삶을 살고자 하나 이 놈의 다방집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김완선에 이어 엘라까지 연타석으로 내 눈과 마음을 자극했는지 전혀 마음에도 없는데 아직도 거시기가 화를 내고 있었다.
또 이를 어쩌나 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생각을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두 달 전 미스 나 누나가 처음 왔던 어느 토요일처럼 또 몽정 따위를 해 팬티를 버리느니 차라리 지금 배설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내실 옆 쪽방 내 의자에 앉아서 바지를 내리려고 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서글프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지만 몽정을 했을 때의 낭패보다는 나을 거라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그때, 내 시계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하필 이땐가 싶었다. 부리나케 바지를 올리고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역시 캐산 집사였다. 지난 두 달 동안, 벨루아 공국의 왕실에서 일을 하는 캐산 집사는 간혹 내게 연락을 해왔다.
시계 위로 뜬 입체 영상으로 나에게 벨루아 공국의 어제와 오늘, 그 문화와 주변 정세, 정치적인 어려움과 앞으로 벨루아 공국이 헤쳐나가야 할 방향 등을 강의했다. 뭐 이런 유식한 집사가 다 있나 싶었다. 벨루아 공국에 있는 아버지의 가족과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차일피일 대답을 미뤘다. 역시 공주와의 약속은 신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또다시 그 공국에 들러야 할 때인가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길 갈 수 있지?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잘 나가는 D 카바레 앞 수도 다방의 그 바쁜 토요일 밤이었지만 엄마는 11시 30분이 지나도 다방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미스 나 누나도 퇴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미수 나 누나는 다방집 새방에서 노름을 하던 동네 청년 필수 씨 일행과 같이 나갔다. 그래도 한판마다 얼마씩 돈을 모으는지 노름판 개평을 친절한 필수 씨가 챙겨서 주었다.
미스 나 누나를 찾는 미군 존 스튜어트 소위는 오늘따라 다방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렇게나 사람이 좋은 필수씨도 가끔 이 존 소위에게만큼은 으르렁 될 때가 있었다. 다방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어항의 물고기들도 별 탈 없다는 듯 유유히 어항의 이곳저곳을 유영하고 있었다. 다만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큰 하얀 잉어가 없어 조금은 허전했다.
손님이 모두 나간 뒤에도 그렇게 한 참을 어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엄마는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더 걱정이 되어서 셔터 문을 닫고 동네에 엄마를 찾으러 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때였다. 다방집 계단에서 뭔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하는 생각을 하며 다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누군가를 들처업은 미술 선생이 보였다.
“서, 선생님!”
“어! 나야! 나! 방! 방! 방이 어디야!”
미술 선생의 등에 업혀 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였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 여름 방학 이후 좀 조용했다 싶었는데 다시 엄마의 주사가 시작된 것이다.
“아들! 울 아들! 엄마! 오늘 술 좀 마셨다.”
미술 선생의 등에 업혀서도 엄마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미술 선생은 평소 프랑스 파리 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나름의 시크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당장이라도 죽을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방집 내실 안으로 들어온 미술 선생님이 엄마를 내실 이불 위에 내려놓으면서 마지막 안간힘을 썼는지 방귀를 뀌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나도 예의가 있으니…. 이 근방에서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레인코트를 입고 서울 말씨를 쓰는 이 멋진 남자가 방귀를 뀌면서 엄마를 이불 위에 내려놓자 엄마가 벌러덩 자리에 들어 누웠다. 11월에 접어들어 초겨울이 되었는데 미술 선생의 얼굴을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뭔가 힘에 겨운 지 미술 선생은 어항 옆 다방집 검은색 레자 의자에 큰대자로 기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유유히 유영하는 어항의 물고기들은 미술 선생이 지금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 턱이 없겠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미술선생에게 적나라한 내 생활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 미칠 것 같은 마음 반, 엄마가 이렇게라도 집에 돌아와 안도하는 마음 반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선생님,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그, 그래! 헉헉헉!”
나는 부리나케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미술 선생은 벌컥벌컥 물을 마신 후 말보로 레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당시에 양담배를 피우는 우리나라 사람이 드물었는데, 역시 별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선생이 내게 담배를 쑥 내밀었다.
“한 대 펴! 괜찮아!”
잠시 머뭇 거렸지만, 기왕에 다방집 내실도 보였는데 뭐! 어때! 하는 심정이 들었다. 내가 4인용 식탁이 있는 정상적인 가정집에 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 선생 앞에서는 나를 과장하거나 잘 보일 이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 네, 선생님! 그, 그럼 한 대만 피우겠습니다.”
말보로 레드 한 개비를 받아 입에 물었다. 다방집 테이블 위에 있는 육각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한동안 순한 장미만 피웠더니 한 모금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자마자, 핑 하고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술 선생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나, 네 엄마에게 관심이 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 네 엄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네? 엄마를 언제 보셨다고……? 오늘 처음 보신 거 아니세요?”
“아냐! 아냐! 여기 구한 집이 이 근처라 D시에 내려오고 나서 몇 번 여길 들렀었지!”
“그럼 제가 왜 한 번도 선생님을 이 가게에서 못 뵀죠?”
“저번에 네가 나보고 장사 끝났다고 했었잖아! 그때 봤잖아.”
“아! 그랬었죠.”
“그 후로는 네 엄마랑은 가끔씩 시간 날 때 밖에서 봤었다. 이렇다 할 관계는 아니고 아직 편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
가끔 엄마가 외출을 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 학교 미술 선생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평소 당황을 잘 하지 않는데, 오늘은 담배 맛을 잃을 정도로 약간 멍해졌다. 그냥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내뱉고는 용기를 내어 미술 선생에게 물었다.
“그럼 두 분이 사귀시는 건가요?”
“아니! 아직 그런 건 아니야. 나도 그렇고 네 엄마도 그렇고 외로운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아. 너도 이해할 나이가 된 것 같고……. 처음 봤을 때부터 너는 다른 아이들하고는 다른 뭐랄까 굉장히 성숙한 느낌이 들었어. 속을 알 수는 없지만 뭔가 어른스럽다고나 할까?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네!”
“사실 간단히 저녁 먹으면서 술 한 잔 마셨는데 저렇게까지 네 엄마가 취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미안하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
마침 엄마를 찾으러 나가려고 하던 차였거든요.”
“평소에도 술을 많이 드시니? 오늘 좀 놀랐구나!”
“아, 아뇨, 지난여름방학 때 한 번 그랬다가 요즘은 잠잠했었는데……. 작년부터 주변에 다방들이 많이 생기면서 장사가 안 되고 나서부터 힘이 드셨는지 엄마가 술을 많이 드시기 시작했어요. 이기지 못할 술을 마시다 보니 이런 사고가 나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니다. 네 엄마랑 이야기를 나눠보면 네 걱정을 많이 하셔! 너 만나면 학교에서 잘 좀 봐달라고 하시더구나. 너도 잘 하고 있겠지만 엄마랑 좀 더 많은 대화를 하면 좋겠구나.”
“아! 네, 선생님!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나저나 밤이 늦긴 했지만 뭐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냐! 나도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아! 물 잘 마셨다. 어휴! 보기보다 무게가 있으시네!”
“엄마가 요즘 술살이 오르셔서…….”
“아! 그래! 참, 혹시 너 미술 쪽에 관심이 있니?”
“아니요. 그냥 학교 미술부이긴 한데 그렇게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림 그릴 때는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어서 좋거든요.”
“그래? 내가 보기엔 너 그림에 재능이 좀 있어! 그쪽으로 생각 좀 해 봐!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아! 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나 이제 그만 가볼게!”
우리 다방집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서울 말씨로 남자 두 명이 이야기를 한 순간이었다. 여하튼 기운을 너무 썼는지 거의 초주검이 된 얼굴을 한 채 일어나던 미술 선생은 뒤돌아 다방집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오르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한쪽 무릎이 푹 꺾였다.
“어헉!”
“괘, 괜찮으세요. 선생님?”
“아! 그래, 나 괜찮아! 허허허!”
“조심히 가세요.”
오늘은 학교에서 잘난 척이나 멋진 척은 혼자 다하고 다니던 무슨 변태 같던 미술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래도 엄마가 저 선생님보다는 몇 살 연상일 텐데 아직 엄마 미모가 살아 있다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선생님이 나가고 다방집 문단속을 마치자 긴장이 풀리면서 뭔가 멍한 순간이 찾아왔다. 이럴 때는 AFKN을 튼다. 마침 프린스의 뮤직 비디오가 뜬다. <Purple Rain>. 프린스! 멋지다.
일요일 아침, 과음에 숙취로 울 엄마가 일어나질 못했다. 죽은 듯이 내실에 누워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잠시 인기척을 내 보니 엎드려 있던 엄마가 눈을 살짝 떴다.
“아들! 엄마 물 한잔만 갖다 주라!”
“어! 알았어!”
나는 군말 없이 물 한잔을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가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미스 나 누나가 2주에 한 번 일요일마다 쉬기로 해서 일단 내가 엄마를 대신해 7년 전통의 마스터 원두 가루와 브랜드 원두 가루 반반 비율에 소금 약간 첨가한 수도 다방식 오리지널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 다방집의 아침을 깨우시는 동네 할아버지들에게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내드렸다. 귀여운 동네 할아버지들은 왜 미스 나가 안 보이냐는 투정을 부리셨고 나는 오늘이 쉬는 날이라 다음 주에는 꼭 올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러고 보니 이 할아버지들 이후에 쌍화차를 즐기시러 오시던 교수 할아버지께서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슬쩍 내 마음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 집중을 해서 교수 할아버지의 마음을 찾았다. 나는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도 다른 사람의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교수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 세상 어디에도 찾아지지 않았다. 문득 교수 할아버지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저릿하면서도 묵직하게 아파왔다. 마치 가족을 잃는 게 이런 느낌 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나마 다방집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내가 마음으로나마 편하게 대했던 분인데 이제 그 교수 할아버지에게 쌍화차를 대접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타까웠다. 이별이란 또는 죽음이란 이런 것이었구나! 엄마랑 살아오면서 현직 대통령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의 목숨을 저세상으로 보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 감정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다방 주방에 나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아! 머리야!”
“좀 괜찮아!”
“아!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어. 이제 술이 안 깨! 술 끊어야지! 아이고 머리야!”
“좀 괜찮아졌냐고요!”
“뭐, 그냥 그래! 아이고 두통이 좀 있네!”
“약 좀 사다 줄까? 엄마!”
“아니!”
“음……. 엄마! 그나저나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은 어떻게 알아?”
머리를 만지던 엄마가 나를 멀끔히 바라보더니 아주 잠깐 엄마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눈빛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디 있냐고 내가 물었을 때 봤던 모습과 흡사했다. 엄마는 단지 아빠가 미국에 갔다고만 했다. 언제 올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해 더 이상 엄마에게 묻지 않았다.
“어! 너는 엄마가 그 선생님 아는 걸 어떻게 알아!”
“기억 안 나? 엄마? 어제 이동철 선생님이 엄마를 둘러업고 여기까지 왔잖아!”
“그, 그러니? 내가 미쳤구나! 진짜 내가 그 사람한테 업혀 왔다구? 내가?”
“엉! 엄마! 정말이야! 기억 안 나?”
“아! 놔! 아이 정말 술을 끊어야지! 내가! 이거 너무 챙피한 일이잖아!”
“그래서, 엄마! 부탁인데, 좀 줄이면 좋겠어!”
“아! 알았어! 아들! 끊을게! 술! 됐지?”
“아니, 술 끊으면 엄마는 무슨 낙으로 살아! 그냥 좀 줄여!”
“어이구! 엄마가 알아들었으니 넘 걱정은 마! 울 아들은 다 좋은데 걱정이 너어무 많아!”
“내가 무슨 걱정이…… 아! 참, 엄마! 그나저나 속은 좀 괜찮아! 김치 콩나물 죽 좀 끓여줄까?”
“어이구, 기특하네! 울 아들! 아니 그것보다 엄마 조금만 더 잘게! 가게 좀 봐주라!”
이곳에 내려와서 소위 꿀꿀이죽이라는 김치와 콩나물과 밥을 넣어서 푹 끓인 죽을 엄마는 좋아했다. 서울에는 없는 음식인데 돼지국밥 하고 그 김치 콩나물 죽은 먹을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대취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엄마가 해장을 찾을 때 그 음식을 만들어 주곤 했다.
다방집 내실에 다시 들어간 엄마를 대신해 다방집 도련님으로서 우리 다방집을 찾아온 손님들을 맞아야 했지만 자꾸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서도 벨루아 공국에서 주워들은 바가 있어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내 출생에 대한 비밀은 어디서 정확히 들을 수 있는 일일까? 이 모든 키를 쥐고 있는 엄마에게 나에 대한 진실을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오늘따라 엄마 상황을 아는지 쌍화차 할아버지들이 가시고 나서는 다방집 손님이 거의 들지 않았다. 객쩍은 28인치 삼성 TV에서는 NHK, 아니 KBS 전국 노래자랑이 방송되고 있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무대가 섰나 보다. 무슨 한복을 입었는 데다가 이름 모를 탈까지 쓰고 나온 이가 있었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얼쑤 추임새를 넣으며 한바탕 탈춤을 추었다. 끝에는 부르르 몸을 떨기도 했다. 저 모습을 어디선가 본 듯했다. 그런데 출연자가 쓴 탈이 무슨 탈인지 이름은 몰라도 예전에 대선호국에서 봤던 그 도깨비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자세히 보고 있는데 가면을 벗으니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머리를 좀 세었지만 키도 크고 건장했던 그는 <그때 그 사람>이라는 가수 심수봉의 노래를 간드러진 목소리에 콧소리까지 잔뜩 넣어 불렀다. 노래를 못하는 내가 들어도 참 택도 없는 실력이었다.
‘땡!’
어라! 그 소리와 함께 나는 어느새 무슨 실내 체육관 같은 곳에 서 있었다. 주변에 고양이 시녀들이 보여서 이곳이 벨루아 공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체육관 은 둥근 돔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맹렬한 속도로 실내 전체에 설치된 둥글고 큰 링을 통과하고 있었다. 하도 전광석화 같은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순식간에 벨루아 공국의 샤디아 공주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기록 단축!”
나는 깜짝 놀라서 샤디아 공주를 향해 외쳤다.
“뭐야! 왜?”
“어마마마께서 너를 찾으셔!” 그렇게 뛰어놓고도 숨 한 번 고르지 않으면서 샤디아 공주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누구? 네 어머니? 이 나라 여왕님?”
“응, 우리 벨루아 공국의 여왕이자 통치자! 나를 따라와!”
뭔가 불만이 섞인 말투였다. 벨루아 공국의 공주는 또다시 실내 체육관 출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야! 같이 가!”
“어서 와!”
여전히 시녀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발이 빠른 샤디아 공주를 따라 허둥지둥 실내 체육관을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벨루아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이 왕궁이 상당히 익숙하기까지 했다. 벨루아 왕궁 출입구에서 중앙 거대한 홀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여왕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여왕의 집무실은 거대한 중앙 홀에 아주 가까웠다. 거대한 홀을 지나서 바로 큰 문을 지키는 근위대를 통과하면 여왕의 집무실이 나왔다. 샤디아 공주의 집무실에 비해 두 배는 커 보이는 아주 호화로운 방에는 역대 통치자로 보이는 여왕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역시 창밖으로 화려한 정원이 보였다.
그 집무실에 생각보다 현대식의 가구들을 갖추고 있어서 놀랐다. 책상 위에는 TV와 비슷한 형태의 모니터가 놓여 있었고 그것을 여왕은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왕 역시 왕관 따위를 쓰고 있지 않았다. 샤디아 공주를 꼭 빼닮은 40대 초반의 위엄 있어 보이는 여성이 단단하고 안정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코가 유난히 길었고 오뚝했으며 운동선수 출신 마냥 상당히 체격이 훌륭했다. 우리 엄마처럼 술살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40대였다. 머리는 검은색이었지만 역시나 우리나라 사람인지 외국사람인지 잘 모를 묘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이시자 벨루아 공국의 최고 지존이신 샤론 여왕이셔!” 나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마마마! 찾으시던 그 페일 가문 소년이에요.” 나는 그 샤론 여왕이라 불리는 분에게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쨌든,
“아, 안녕하세요. 여왕 폐하!”
“오! 네가 바로 페일 공작의 아들이로구나! 넌 네 아버지 모습을 쏙 빼었구나.”
여왕의 눈이 감회에 젖는 모습이었다.
“네! 제 아버지를 아시나요?” 내가 질문을 던지자 여왕은 매우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다마다. 네 아버지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친했단다! 아! 친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모험과 전쟁도 같이 했었지. 네 아버지가 나를 구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한동안 벨루아 공국의 여왕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왜 찾았는지 이유를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네? 무, 무슨 이유인데요?”
나는 샤디아 공주를 살짝 쳐다보았다. 샤디아 공주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꿈쩍하더니 정말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나를 이어 이 나라를 통치할 나의 딸 샤디아 공주와 결혼할 사이다. 그것은 네 아버지와 내가 맹세한 약속이다. 결혼식은 앞으로 한 달 후가 될 것이다.”
“네? 정말요? 정말 제가 공주랑 결혼을요? 꼭 해야 하는 건가요? 여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