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애완동물 사용설명서를 찾아보다.
아무리 세상이 21세기 하고도 한 세대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틈을 즐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나는 그 틈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틈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아홉 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 생활 내내 애써 키웠던 고양이는 코숏(코리안 숏 테일)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설탕이었고 살짝 등에 반점이 있었지만 정말 설탕처럼 털이 새하얀 고양이였다.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그만큼 고집도 센 암컷 고양이였다. 그런데 십여 년간의 결혼 생활을 하다가 설탕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한동안 깊은 우울감에 빠졌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주인보다 빨리 죽는 어떤 생물체도 키우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남편이 새로 집에 들인 애완동물 로봇 아리는 최신형 인공지능을 탑재해서 그런지 귀여운 아기 동물의 재롱을 있는 대로 부려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배터리와 필수 부품(특히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변색이 되는 하얀 털까지)을 교체하면 수명도 거의 반영구적이었고 먹이를 주거나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분변을 치울 이유도 없었다. 나는 늙거나 죽지 않는 이 아기동물의 귀여운 재롱을 언제나 바라볼 수 있었고 어느새 설탕의 빈자리를 달래게 되었다. 그런데 대화모드에서 아리의 대화는 조금 남달랐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강의를 마치고 대형매장에 가서 장을 봐 집 현관에 들어서면 새끼 토끼 고양이 암컷으로 설정된 아리가 쪼르르 쫓아와서는 살랑살랑 작고 긴 귀와 조그마한 꼬리를 반갑게 흔들어주었다.
“우쭈쭈! 아리야! 오늘 집에서 뭐하고 놀았어?”
“갸르릉! 네, 은실님! 그냥 잘 놀았어요.”
“으응! 어떻게 잘?”
“주인님!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시면 다쳐요. 그냥 여기까지!”
“야! 이게 갑자기 열을 받게시리! 야! 아리! 그게 말이야 방구야! 엉! 엄마한테 말버릇 보소!”
“주인님! 흥분하지 마세요. 계속 그러시면 저 그럼 대화하지 않을래요. 대화모드 해제! 대화모드 해제!”
“흥! 나도 말 안 해! 칫!”
그러더니 뽀르르 거실 저쪽으로 어딘가로 가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도대체 아리의 사용설명서에는 저런 못돼 먹은 행동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인지! 장을 본 걸 현관 옆에 그냥 놓아둔 채 소파에 앉아 한참을 아리의 사용설명서를 찾아봤지만 저 귀여운 인공 생명체의 특이성이나 싸가지 없는 이상행동을 설명하는 설명이나 약관이 없었다. 애프터서비스 연결 콜 넘버를 내 오른쪽 눈에 이식한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망막이 인식해 무선 이어 텔레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인공지능형 콜센터의 남성형 AI 보이스가 응답을 해왔다. 양성평등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어서 고객의 성별에 따라 이런 부분도 세심하게 반응하게 됐다.
“안녕하세요. 콜센터 담당 AI 보이스 124호입니다. 고객님,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우리 집에 아리라고 2017년에 나온 펫봇 시리즈 GS-2821 XT형 모델이 있는데요.”
“네, 고객님! 우선 고객님 댁에 있는 펫봇의 제품 번호를 부탁드립니다.”
“아! 잠시만요? 아! 제품 번호는 지금 클라우드 메시지로 보내드릴게요.”
사용설명서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가전 완구제품 보증서에 있는 아리의 제품 번호 KSLR-KAP-Edm-GS-2821-ZY2000593-15001A를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망막으로 인식해 콜센터 메시지로 보냈다.
“고맙습니다. 잘 받았습니다. 확인 감사드립니다. 등록된 정보를 통해 고객님께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등록된 구매자 고은실 고객님! 본인 되십니까?”
“네, 본인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고객님. 그럼 제품에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요?”
“다른 건 아니고 얘가 좀 이상한 대답을 하곤 해서요. 한 마디로 얘가 싸가지가 없어요. 다른 펫봇들도 그런가요? 이거 무슨 고장 아닌가요?”
“네, 고객님. 저희 펫봇이 최신형 인공지능 탑재형이다 보니 재미 기능과 밀당 기능이 인공지능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어느 정도 펫봇과 고객과의 애정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재미와 밀당 기능이 들어간 고급 AI 모드로 변환됩니다. 고객님께서 구입한 펫봇에게 애정을 많이 주셨나 봅니다.”
“아! 네, 그건 그렇죠!”
“잘 하셨습니다. 저희 회사는 고객님처럼 한결같이 저희 펫봇에게 애정을 쏟아주시는 고객님에게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거듭 고맙습니다. 고은실 고객님. 그럼 다른 불편 사항 없으신지요?”
“아! 네. 뭐 다른 건 별 탈이 없어요. 아니, 그냥 그런 고급 기능 없어도 되는데?”
“네, 고객님. 잘 알겠습니다. 기왕에 고급 서비스이니 당분간 지내보시고 더 불편하시면 저희 애프터서비스에서 직원이 댁으로 찾아뵙고 조정을 하겠습니다. 방문 시 비용이 필요에 따라 청구될 수 있습니다.”
“네! 그럼 좀 더 지내보겠습니다. 이만!”
“네, 고은실 고객님. 고맙습니다. 저는 언제나 고객님께 최선을 서비스를 제공하는 콜센터 담당 AI 보이스 124호였습니다. 멋진 하루 보내세요.”
한참을 사람도 아닌 남성형 AI 보이스랑 떠들고 나니 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보통 그 친구랑 사랑을 나눈 후에 같이 짜장면을 먹었다. 매운 걸 싫어해서 달착지근한 짜장면을 먹었다. 일부러 모텔도 그 중국집 근처에 잡았다.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 후엔 언제나 배가 고팠다. 내가 중국집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면 나중에 그 친구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 집 짜장면은 건강한 재료를 썼다. 알맞게 조각을 낸 잘 익은 감자와 식감을 살린 돼지고기, 그리고 신선한 양파를 썼다. 꽤 유명하다는 고급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다 썩은 양파를 씹은 적이 있었다. 유명 맛집과 썩은 양파! 그때 이것들이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참았다. 교강사 모임이라 다른 수학과 교수들도 있는 자리였고 우아한 수학과 여성 강사로 존중을 받던 차라 차마 험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 친구랑 사랑을 나눈 후 나는 꼭 짜장면을 먹었다. 그 친구는 우육탕면을 시켜서 먹었는데 꼭 국물까지 다 들이켰고 헤어지기 전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는 그 친구가 잡아주는 부드러운 손의 느낌까지 좋았다.
그 친구는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수술 자국 하나 없는 순수한 몸 즉 pure body였다. 요즘 들어 나처럼 눈이나 귀 또는 신체 장기를 기계로 바꾼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나는 주시가 아닌 오른쪽 눈의 망막을 개인용 클라우드 컴퓨터와 통신이 되는 클라우드 컴퓨팅 강화 인공 망막으로 바꾸었다. 남편이 결혼 초기에 자신도 했더니 편하고 좋다며 내게도 권했었다. 멋모르고 현대식 라식 수술이라고도 불리는 수술에 동의했다. 수술 후 약간의 이물감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응이 되었다. 여러모로 편리해서 좋았지만 퓨어 바디를 가진 이 친구를 만나면 괜히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친구는 순수한 몸 그 자체였지만, 어깨 죽지에 밤톨만 한 복점이 있었다. 그 친구는 이제는 몸 전체가 무겁게 축 늘어진 남편과 달리 군살 하나 없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다. 어깨선에서 허리로 내려가는 라인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어떤 향수도 아닌 그냥 비누냄샌데도 나는 좋았다. 머리는 짧고 단정했고 매끈한 목선과 턱선도 고왔다. 티눈 하나 없이 깨끗한 발도 예뻤다. 무엇보다 그 친구는 다정했다.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내가 연락하면 언제든 시간을 내주었다.
언젠가부터 저녁 무렵 짜장면 냄새를 풍기고 집에 들어가면 간혹 아리는 나보고 음탕하다고 말하곤 했다. 네가 뭘 안다고? 뜨끔하기도 하고 도대체 이 녀석 뭐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쨌든 나름 이름이 나 있던 실력 있는 수학과 시간 강사로서 강의 전문 교수라고도 불렸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며 매우 우아하다는 말을 듣던 여성 수학자였다. 언제나 음탕과는 거리가 먼 단아한 옷차림에 찰랑이는 단발을 해 우아함 그 자체인 나를 두고 음탕하다니?
그러면 언제나 그렇듯 돈을 빌리려는 친구 지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은 안 했지만 연애를 아주 많이 그리고 자주 하는 여자 친구인데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애인들은 그녀를 호구로 알았다. 나는 이 친구에게 적지 않은 돈을 빌려주었고 아직 받지 않았다. 나는 주저리 그녀의 성적 취향과 남자 혹은 여자 애인들과 가진 관계에 대해서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고 가능한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절대 퓨어 바디를 가진 그 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오래 동안 알고 지냈던 그리고 돈을 잘 갚지 않기로 유명한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는 이유다.
그리고 가끔 SNS로 남성형 섹스 봇의 성매매 알림이 오면 참 난감해진다. 내 개인정보가 어떻게 노출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의 성적 취향까지 저들이 알고 있어서 놀랐다. 성매매 시장에서도 여성형과 남성형 섹스 봇의 진출이 급격히 이루어졌으며 급격한 변화로 섹스 봇으로 전염되는 이 피부질환이 새로운 성병으로 명명되었다.
또 하나, 어떤 이유에 선지 2028년의 서울은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2023년부터 아이 출산율이 0.23 퍼센트에 다가섰다. 괜한 남편을 두고도 퓨어한 바디를 가진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나처럼 전국 곳곳에 여자끼리 밀회를 나누는 고급스러운 모텔이 창궐하는데 어린 아기는 눈을 씻고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아이처럼 말을 하고 재롱을 피우는 애완동물 로봇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업은 시작하자마자 대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