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어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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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전골이란,
모름지기 맑은술과 친구가 있어야 진정한 맛 아니겠냐고.
매섭게 바람이 부는 날이면 좋겠다. 귀가 빨개지고, 볼이 시리는. 뜨끈한 온돌 바닥이 있는 곳이라면 더없이 환영이다. 이런 날씨의 기쁨을 하나 꼽자면 바로 전골이 가장 맛있는 시기라는 것. 곱창전골과 맑은술 한 잔이면 겨울 추위도 반갑다.
대체로 술꾼들은 국물을 안주 삼지 않는다지만, 겨울은 이야기가 다르다. 제철을 맞은 음식을 즐기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런 계절에 전골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반짝이는 불빛 사이로 북적이는 골목길. 거나하게 마시고 나오면 추위가 저만치 달아난다. 전골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앉아 먹을 수 있으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처음에는 뜨끈한 국물을 몇 숟가락 뜨고, 배추 쑥갓 버섯 곱창을 순서대로 건져 맛본다. 그리고 건더기가 살짝 남았을 때, 2차를 개시한다. 누군가는 칼국수나 볶음밥 중 하나를 고른다지만, 사실 둘 다 취하는 방법도 있다. 더욱이 술과 함께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국물을 추가하고 칼국수를 주문한다. 진득한 국물에 면발을 호로록 먹고서는 3차로 밥을 고슬고슬 볶아 마무리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잔을 비우고, 이야기를 나눈다.
국물이 자작한 전골이 바닥을 기점 삼아 날아오를 때까지, 서로의 취향을 이야기한다. 어두운 곳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해. 이 동네는 먹태를 잘 굽는 집이 없어. 단골 술집이 전골집이면 좋겠는데, 집 앞에 호프집이 없다, 만두 사리도 넣으면 맛있겠는데, 칼국수가 좋아 우동이 좋아, 처음처럼 보다는 참이슬.
“잠깐, 너 그거 구별할 수 있어?”
“뭐를?”
“처음처럼 보다는 참이슬. 확실해?”
“처음처럼 보다는 참이슬이 더 맛있어.”
“뭐래, 눈 감고 마시면 두 개 구분 못 해.”
“뭐래, 사장님. 처음처럼 한 병이요! “
그렇게 3번 테이블에서는 처음처럼과 참이슬을 구분하는 작은 대회가 열린다. 그동안 전골은 바르르 바르르 끓어오른다.
오랜 시간 쌓여진 취향은 그 사람의 결이 된다. 커다란 나무가 갈려져도 반 토막 난 나이테가 변하지 않는 연륜을 가지는 것처럼. 동그랗게 쌓인 결은 lp판과도 같아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서로의 취향을 나눈 저녁이 지나간다.
전골 바닥에 눌어붙은 볶음밥도 끝이 나고, 마지막 남은 술잔도 가볍게 털어내고 나면 찬 바람을 뚫고 갈 용기가 생긴다.
“이제 가자.”
어지간해서는 입김이 나지 않는 제주이지만, 이런 날만큼은 하-하고 내뱉은 숨이 둥실 하늘로 올라갔으면. 전골집 앞에서 고갤 들어 별이 총총히 비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은 별이 쏟아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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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숲 ‘전골의 맛’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