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종인 Feb 11. 2016

왠지 그냥 그래요

2008.09.24

당신은 사랑을 믿어? 지난주 회화수업 중에 에슐리가 한 질문이었다. 나는 사랑은 진행 중일 때가 아니라 끝났을 때 알게 되는 거라고 대답했다. 에슐리는 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수업을 듣던 모든 학생이 웃었고, 나 역시 웃고 말았다. 이어서 나는 조금 떠듬거리며 천천히 설명을 해야 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접촉사고라 벌떡 일어나 이상이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하고 좋게 헤어졌지요. 그리고 그 사람은 집에 와서 며칠을 잘 지냈어요. 문제가 없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죽을 정도로 고통이 찾아왔죠.”


문법에도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에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이어 에슐리는 나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다른 학생에게 했고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그 날의 수업이 끝났고 에슐리는 간단한 과제를 내주었다.


“다음 수업 토픽은 타임머신이 있다면 무얼 하고 싶은지 예요. 각자 생각을 정리해오도록. 안녕.”
  



그 날 우리가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침대에 기대 앉아 울었고, 나는 화가 나서 소리까지 질렀다. 이런 싸움은 그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결국 그녀의 방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앉아만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쾅, 하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도로 가득 점령한 자동차들이 햇빛을 반사시켜 눈이 따가웠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어디로 향한다는 목적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을 지나 커피숍을 지나면서도 나는 끝내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었다. 한 시간쯤 동네를 배회한 끝에 그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거기엔 이미 그녀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잠깐 머리 식히고 돌아와. 문 안 잠궜으니까, 빨리.
  

감정이라는 건, 사소한 부분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어떻게 말하면 ‘잠궜’이 아닌, ‘잠갔’이 맞는 표현이라고 그녀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조금만 놀리면서, 그녀가 삐치지 않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베스킨라빈스에 들러 파인트를 주문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체리쥬빌레를 맨 위에 가득 담아서.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정말로 좋아했고, 그녀에게 바칠 조공은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녀는 울던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집 앞이라고 했는데도 점원이 굳이 넣어준 드라이아이스를 싱크대에 버리고 파인트 통을 냉장고에 넣을 때까지 그녀는 깨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기로 젖은 눈은 퉁퉁 붓기 시작했고 두 뺨은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나는 손을 가져가 그녀의 머리카락들을 헤집었고 그녀는 잠에서 깼다.
  

“충분히 반성하고 왔어?”
   

그녀가 내게 몸을 기대어와 나는 살며시 안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응. 충분히 반성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왔어.”
“거기에 플러스로 눈에 얼음찜질도 해줘야해.”
“알았어. 일단 뭐 좀 먹고 하자.”
“먹을 거 없어.”
“내가 사왔어.”
    

그녀를 다시 원래 위치로 옮겨놓은 뒤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냉장고에서 파인트 통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금방 얼굴이 밝아지며 침대위에서 폴짝 뛰었다. 침대 위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고 기분이 좋아진 그녀를 달래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눕혔다. 그리고 아이스팩을 수건으로 감싼 뒤 그녀의 눈가에 덮어주었다.

“캄캄해.”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던 나는 문득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보았던 것이다. 베스트극장이었는지, 테마게임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짧은 영상이었다.
  

“한 아이가 나와. 그 아이는 초등학생 정도 되었는데 시골동네에서 학교를 다니는 듯해. 왜냐하면 그녀석이 친구들하고 양 옆에 나무들이 울창한 가로수길을 뛰어 내려가는 장면을 기억하거든. 그때 그 아이는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어느 미인을 눈치 채고 잠시 뒤돌아봐.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아이와 계속 서로 마주보지만 이내 아이가 뒤돌아서 뛰어 가버리지. 그 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이가 그 여인을 다시 고등학생 시절에 한 번 보았나, 대학생 때 보았나 그래. 암튼 그 아이는 다 자라서 그 때 보았던 그 미인과 꼭 닮은 여자와 결혼을 하게 돼.”
“어, 그 여자가 시간여행을 하는 거구나?”
“응 그렇지.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뭐랄까 약간 권태기 같은 느낌이랄까, 사랑하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어. 근데 남자가 출근하기 전에 여자가 노란 꽃을 한 송이 들고 머리카락은 물에 다 젖어서 나타난 거야. 얼굴은 울었던 흔적이 가득해서. 남자는 갑자기 화를 내, 어디 갔다 온 거냐고, 밖에 비가 오냐고. 음,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암튼 대충 여자는 그 상황을 모면했고 남자도 그냥 출근했던 거 같아. 그리고 그 뒤에 여자가 죽었지.”

나는 잠시 침을 삼키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입안에서는 달콤한 향내가 가득 맴돌았다.
  

“그리고 아이가 있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내 기억으론 아이가 고등학생 쯤 자랐을 때인가? 그때쯤 남자도 나이가 많이 든 모습으로 출근을 해. 한참 회사를 바쁘게 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거야. 그래서 비를 피하려고 서둘러 들어간 가게가 꽃집이었고 거기서 노란 꽃을 보고 무언가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아내가 서 있었어. 남자는 아내를 보고 손을 흔들었고 아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지. 남자는 곧장 꽃을 한 송이 들고 아내에게 달려가. 그리고 아내와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카메라가 잡아주며 끝나는 이야기.”
“또 눈물 나려고 그래.”
“울지마, 바보야.”
“응. 재미있었어.”


아이스팩을 감싼 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있다가 내게 물었다.
  

“근데, 오빠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아이스팩을 뒤집어 다시 그녀의 얼굴에 덮어주며 대답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오늘 낮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서 너한테 화내기 전에 너를 꼭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토닥여주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네가 이해할 때까지 말해줄 거야. 그럼 네가 울지도 않을 테고, 눈이 붓지도 않을 테고,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어서 다이어트에 실패하지도 않을 테니까.”
“진심으로?”
    

그녀에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체리쥬빌레 맛의 달콤한 키스였다. 키스를 끝내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수줍어했다.
  

“눈을 가리니까 뭔가 이상해.”
“그래?”
“응. 사랑한다고 말해줘.”
    

나는 그녀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녀가 잠들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오늘, 수업이 시작되고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에슐리가 나를 지목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삼 년 전에 에슐리와 똑같은 질문을 한 여자가 있었어요.”
“와우, 그래서 당신의 대답은 어떤건데?”
“삼 년이 지났어도 그때랑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신중히 단어 하나하나를 골랐다. 에슐리도 그런 나를 끈기 있게 기다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왠지 그냥 그래요.”



매거진의 이전글 입술이 닿지 않는 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