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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인 Feb 13. 2016

오후 한 때, 소나기

2008.07.09

중학교 삼 학년, 여름방학의 첫 날은 햇살이 따가웠다. 기상캐스터는 오후한 때 비가 내린다고 했지만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영화관까지는 버스로 삼십분. 그래도 그 지역에 하나 밖에 없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이었다. 영화가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상우는 오지 않았다. 은영이 상우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나는 꽤나 오래 지켜보았다.


“상우 못 온다네.”


상우는 갑작스럽게 가족들과 고향에 내려갔다. 아무래도 좋은 일은 아닌 듯 하여 은영은 이유를 묻지 못했다.


“어떡하지? 상우가 우산 들고 오기로 했는데.”


빨강과 파랑이 번갈아 놓인 스톨의자에 나와 은영은 자리를 하나 비워두고 앉았다. 그러니 둘 다 파란 스톨의자 위였다. 은영과 나 사이 빨간 스톨의자 위에는 각자의 가방과 영화표 세 장이 놓여 있었다. 둘만 남겨졌다는 느낌에 스톨의자 하나의 간격이 참 다행스러운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똑같이 따라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들어가자.”

은영이 먼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영화표와 가방을 챙겨 은영의 뒤를 따랐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G17과 G19. 각자의 자리에 앉아 어스름한 불빛 사이로 시작되는 영화 예고편을 보았다.

“저런 거 보고 싶었을 텐데, 아쉽겠네.”

은영이 가리킨 화면에서는 모니카 벨루치의 베드신이 잠깐 스쳐 지났다. 

“그럼. 원래 19세미만 관람불가 영화는 19세 이전에 더 보고 싶은 법이래.”
“누가 그래?”
“우리 누나가.”

은영의 큭큭 웃는 소리가 끝날 때쯤 영화는 시작됐다. 은영과 내가 본 영화는 아주 길고 긴 사랑이야기였다.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 키스신 하나 없이도 ‘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그 말 한 마디가 힘들어 저 멀리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오래 함께 했으면서 한 마디도 못한다는 건 그 만큼 사랑하기 때문일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함께 있으면 왜 사람이 좋아질까. 상우는 진지하게 나한테 물었다. 반장이었던 상우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은영에게 반했다. 짝이 된 것도 같은 학급임원도 아닌데, 같은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상우는 은영을 인연이라 믿었다. 글쎄.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내가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우는 스스로 곧게 나아갈 수 있는 아이였고, 그렇게 은영과 사귀기 시작했다.


교생실습이 끝나가는 오월이었다. 그 날은 담당선생이 아닌, 교생이 직접 진행하는 마지막 수업이었고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상우는 회비를 걷어 교생에게 줄 선물을 미리 준비했지만 꽃을 깜빡하고 말았다. 결국, 내가 상우의 부탁으로 쉬는 시간 잠시 밖에 나가 꽃을 사들고 와야 했다. 꽃을 포장하는데 시간이 걸려 수업시작시간보다 십 분이나 늦게 교실에 도착했다. 우산 없이 다녀오느라 비에 젖은 교복차림으로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이들은 교생 놀리기에 정신이 없었던 순간이었다. 고작 대학교 졸업반의 여학생일 뿐이지만 그 때 우리는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로맨틱하거나 조금은 야한 연애를 교생에게 기대했는지 모른다. 왠지 그런 이야기들로 교생이 조금이나마 얼굴을 붉히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도도했던 그녀는 재치있게 분위기를 잘 넘기곤 오히려 아이들이 비밀스런 속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창밖으론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월의 포근한 공기와 소년소녀들의 생글한 온기가 작은 상자 같은 교실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좋아합니다. 누구를? 은영이를……요. 비명과 환호성이 교차하는 순간, 교생은 교실 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이 빗속에? 나는 엉겁결에 교실 앞으로 걸어가 그녀에게 꽃을 주었다. 교생은 잠시 품안의 꽃을 바라보더니, 상우에게 건넸다. 지금은 너한테 더 필요한 거 같네. 내 발밑으로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빗물이 똑, 떨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 나와 은영은 영화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은영은 짧게 감상을 말했다.
  

“슬픈 영화라서 싫었어.”
“제목부터가 슬퍼보였잖아.”
“제목이 어때서?”
“음 그게, 첫사랑이라는 건 이미 사랑이 끝나고 다음 사랑을 시작했으니까, ‘첫’이란 수사를 붙일 수 있는 거잖아.”
“뭔가 심오하네.”
“아니, 우리 누나가 해준 말이니까 신경쓰지마.”
    

그리고 우리는 인파를 따라 묵묵히 극장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하늘은 맑았다. 극장보다 더운 공기 탓에 숨이 막혀왔다. 간간이 불어오는 습한 바람 탓에 몸이 끈적였다.

“돌아갈까?”
    

내가 은영을 돌아보며 말하자, 은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 앞에 섰다. 

“한 정거장만 걸어가자.”

십분 정도 버스를 기다린 후 은영이 말했다. 햇빛 아래 있었던 탓인지 민소매셔츠를 입은 그녀의 어깨가 빨갛게 변해있었다. 버스정류장이 한산해서 우리가 기다리는 버스는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괜찮다는 나의 말에 은영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로를 따라 가득 매운 가로수 탓에 그늘진 곳을 찾아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 은영은 
  

“한 정거장만 더.”


라고 말했고 그렇게 몇 번을 걷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집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매미가 울고 보도블록은 가로수 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으로 눈을 어지럽혔다. 나는 말없이 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옷가게와 서점과 패스트푸드점을 지나 점점 한산한 곳으로 흘러갔다. 주유소를 지나자 낡은 철물점과 부동산, 이제 막 짓고 있는 상가건물과 점포임대를 대충 붙여놓은 유리벽의 건물이 나타났다. 인적은 점점 드물어져갔고 친절한 버스 몇 대가 우리 옆을 지나며 속도를 줄였지만 이내 곁을 지났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목이 몹시 말랐다. 극장에서 집까지 절반 정도 왔을 때, 나는 앞서가는 은영을 멈춰 세웠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그녀는 잠시 몸을 떨었다. 편의점 안은 냉방이 잘 되어있어서 민소매셔츠를 입은 은영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두말없이 아이스크림 코너로 향했다. 은영은 냉동고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더니 꽁꽁 얼은 팥빙수를 두 개 꺼냈다.

“저기, 나는 별로…….”
    

은영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내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딸기우유.”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 딸기우유를 집어 들었다. 은영은 어느새 카운터로 가서 팥빙수를 전자레인지에 넣어달라는 말로 점원을 당혹케 했다. 내가 은영에게 딸기우유를 가져다줄 때까지 그녀는 계속 ‘이십 초에요!’를 외치고 있었다. 띵! 전자레인지에서 갓 나온 팥빙수를 받아들고 그녀가 계산을 했다. 우리는 편의점을 나와 간이테이블에 앉았다. 은영은 사들고 온 물건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절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녹은 팥빙수에 딸기우유를 반씩 따랐다. 그리고 일회용 스푼으로 팥빙수를 섞기 시작했다. 
  

“신기해.”
“뭐가?”
“여자들은 말야. 자신이 먹고 싶은 걸 그때그때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 더우면 그냥 시원한 게 먹고 싶다고 생각하지 이렇게 딸기우유를 넣은 팥빙수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는 걸.”
“내가 남자라면 ‘여자들은 말야.’라는 식으로 말을 시작하지 않을 거야. 꼭 어른인 척하는 어린애 같아 보이거든.”
“참고할게.”
“그리고, 마치 여자를 많이 겪어본 것처럼 말하지마.”
   

내가 팥빙수를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한 스푼 가득 떠 입안에 넣었다.
  

“질투나.”
    

사르륵 얼음이 뒤섞이며 마찰음을 내고 습한 바람에 매미소리가 아늑하게 울려왔다. 
  

“응. 잘못했어.”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고 봐도 푸른 이파리가 도로변을 따라 하늘 거렸다. 세상이 이렇게 선명했던가, 하고 새삼 나는 놀랐다. 도대체 몇 만 화소인지 모를 만큼, 그 날은 무척이나 맑았다.
  

“근데, 다 우리 누나 탓이야.”
    

은영은 다시, 큭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극장에서부터 걸어오기 시작한지 두 시간이 지나자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 기상캐스터에게 사과할 틈도 없이 은영과 나는 오월의 어느 날 내 모습처럼 흠뻑 젖고 말았다. 
  

“상우 이 나쁜 자식!”
    

나는 소리치며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은영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건물 현관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뛴 탓에 은영은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현관에는 먼지가 쌓인 우편함과 자전거 세 대가 나란히 묶여 있었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작은 화분이 놓여있었다.
  

“왜 내 남자친구한테 화를 내.”
    

은영은 계단 중간쯤에 걸터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춥지 않아?”
“응. 괜찮아.”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은 은영을 바라보기 머쓱해져 나는 괜스레 현관 밖으로 손을 내뻗어 빗물을 받아냈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을 내리쳤다.
  

“소나기인가 봐. 곧 그치겠지.”
    

은영은 대답이 없었고 나는 계속 밖을 내다보았다. 도로에 고인 빗물을 튕기며 차들은 빠르게 달렸다. 빗물이 흩뿌려지는 소리에 은영의 작은 목소리를 잠시 듣지 못했다.
  

“너도 이리로 와.”
    

현관 앞에 서 있던 나는 뒤돌아 은영에게로 걸어갔다. 은영은 엉덩이를 조금 옆으로 옮겨 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 생각난다.”
“언제?”
“네가 교생선생님한테 꽃 사다줬을 때.”
“으아, 남자친구 자랑하려고 한다.”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 너 비 쫄딱 맞고 와서 다 젖었었잖아. 그리고 교생선생님한테 가서 꽃 건넬 때 여자애들 난리도 아니었어.”
    

후두둑, 비 내리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점점 커져왔다.
  

“멋졌어. 아주 많이.”
    

그리고 우리는 조심스레 서로의 입술을 맞대었다. 맞닿은 은영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입술과 작은 혀의 온기가 무척이나 따뜻하여 저 멀리 시베리아를 횡단할 용기 따위 없는 나조차 사랑한다 몇 번이고 외칠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첫 키스?”
“응.”
    

너는? 이라는 말을 내뱉을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참아낸 보람도 없이 은영은 내가 삼킨 말을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나도.”
    

은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장난기가 섞인,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네 누나 때문에 괜히 슬퍼지잖아.”
    

그렇게 은영과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서로의 어깨를 빌리고 있는 사이, 다시 햇빛이 내리고 매미울음소리가 아늑하게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가자.”
    

은영과 나는 축축한 옷은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운 햇살로 옷을 말리며 남은 길을 걸었다. 그날만큼은 오후 한 때, 소나기처럼 그녀의 마음도 내 마음도 금방 맑게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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