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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인 Apr 21. 2016

그리고 그곳에 네가 있었다

2009.02.25

플로리다 주 템파에는 데일 메브리(Dale Mabry)라는 하이웨이가 있다. 템파는 독일군 어느 진영에 별똥별처럼 떨어졌을, 플로리다 지주의 아들이자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였던 데일 메브리에게 이 도로를 아낌없이 헌사했다. 시의 척추와도 같은 이 도로를 기준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데일 메브리 우측에 있는지, 좌측에 있는지만 알면 쉽게 원하는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유복한 유년기 기억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느 때고 돌아가 쉴 수 있는 따스한 추억을 가진 것만큼 부러운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너와 나처럼 딱히 목적지 없는 이방인에겐 60마일 이상 달릴 수 있는 길고 곧은 길,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날 저녁부터 너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삼십 분을 넘게 기숙사 앞에서 기다린 내게 너는 웃으며 달려와 손을 잡았다. 함께 유학 온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간신히 빠져 나온 너의 입에선 달짝지근한 맥주향이 났다. 술 많이 마셨어? 너는 고개를 저었다. 커피 마시러 가요. 너를 차에 태우고 데일 메브리로 향했다.
  

하늘도, 그 아래 땅도 한 없이 널게 펼쳐진 플로리다 위에서 서로를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두 사람이 함께 머물 곳은 쉬이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올드팝 채널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자 너는 선루프를 열어 밤하늘을 보았다. 몸을 비스듬히 운전석으로 기울여 몇 번이고 머리를 내 어깨에 찧었다. 이국에서 맞이한 여름 같은 겨울은 몸도 마음도 느슨하게 해, 하릴없이 스며든 외로움이 삽시간에 번져, 사랑 받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겠다고 속삭이게 했다. 너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만 붉혔다. 
  

데일 메브리에서 힐스브로 어비뉴로 빠져나오면 우측에 ‘24 Hours Open’이라는 초록 불빛이 유난히 선명한 스타벅스가 보인다. 가게 안에 들어서는 동양인 남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건 끝자락 제일 편한 소파에 앉은 노부부뿐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네가 앉은 테이블로 향했다.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나 역시, 맞잡은 두 손의 운명 따위 같아질 거라 믿은 적 없었다. 보드카와 진저 에일, 술 취해 휘청이던 나의 외로운 춤은 따스한 입맞춤으로 잠들 수 있었다. 카펫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잠든 내가 눈을 뜬 아침에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오른팔의 저릿한 감촉. 그리고 그곳에 네가 있었다.
  

모두와 밥을 지어먹고 밤을 정리하고 헤어진 후에, 나는 너에게 전화를 너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 밤의 눈 먼 키스 따위 저 멀리 바다에 묻기 위해 우리는 함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시작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도로 변에 늘어져 있는 야자수와 지나치게 아름다웠던 바다, 헌터란 이름의 늘씬한 사냥개가 너와 나의 뺨을 핥은 일들이 더해져 우리의 시간에 의미가 새겨졌을 뿐. 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사랑은 이런 거야, 라고 굳이 어깨를 부풀리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해했다고 미소 지을 수 있는, 선생님과의 짧은 눈맞춤에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 있는 그런 학생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마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 ㅅ ㅏ ㄹ ㅏ ㅇ, [sarang], ①아끼고 위하는 따뜻한 마음, ②남녀가 서로를 애틋이 그리는 일 –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 낯설고 먼 날들이 되어버렸다. 애벌레 같은 구름들이 숭숭 떠다니는 해변에 앉아 한 글자, 한 글자 네가 가르쳐주기 전까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스타벅스를 나와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너는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두 시가 넘은 시간이라 대부분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패스트푸드점 앞에 머무는 홈리스와 마약상을 피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월마트였다. 카트를 끌고 우리는 맥주와 나쵸를 집었다. 그리고 텅 빈 주차장에 놓인 차 뒷좌석에 앉아 작은 파티를 열었다. 비틀즈와 브레드와 에릭 크립튼 따위는 무시해도 좋았다. 언제부턴가 너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고른 숨을 내쉬었다. 너의 입에선 여전히 달콤한 맥주향이 났다.
  

“별똥별을 본 적이 있어요?”
  

외로움이 많은 네가, 사람을 좋아하는 네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리플을 달았을 때 내가 136번째 코멘트를 끄적이고 있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란 뜻이다. 다만 단 한 번 보았던 별똥별을 추억하고 그 당시를 생생히 묘사하는 너를 보면서 나 역시 언제까지고 기억해줄 거란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것을 나는 막아낼 수 없었다.
  

“당신은 내 인생에 가장 큰 별똥별이에요.”
  

길고 긴 키스가 끝나고 너를 다시 무릎 위에 눕혀 머리카락을 은하수처럼 쓰다듬었다. 네 머리카락 사이로 바닷바람이 서걱였다. 그 내음을 맡으며 나는 너의 북극성이고 싶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한 눈에 찾아낼 수 있는, 네가 어디에 있든 나를 향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마트 주변을 도는 시큐리티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눈가에 어려 고개를 숙여 잠든 네 옆 얼굴을 보았다. 너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여전히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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