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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 J Mar 17. 2017

Youth,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서

(윤제이 칼럼 ; 이번 주말에는 이 전시회가 어떨까요)


청춘이라 일컫는 나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울부짖던 사랑. 그 합일되고 싶은 욕망에 눈뜨는 13-14세부터 시작해 이몽룡과 성춘향의 이팔청춘인 16세 언저리가 아닐까 싶다.

靑春 청춘-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 이라는 한자어를 살펴 보더라도 '청춘'은 인생의 봄날로 유년기를 막 벗어난, 싱그러운 청년기를 의미한다.


D 뮤지엄에서 열린 <YOUTH-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 전시를 다녀왔다.


고매함을 표방하는 기존의 미술관 특유의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한 D 뮤지엄은 십대들은 입장료 천원이라는 기분 좋은 미술관의 이벤트 효과 덕분인지 티켓부스 앞 긴 줄을 선 청춘들로 분주했다. 제각기 젊음을 발산하고 있는 이 풋풋한 청춘들은 잿빛 도시 속 봄의 존재를 알리는 정령들 같았다.

이렇게 존재와 시간이 얹혀진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PART 1 

미술관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어두운 조명 속에 백스트리트(뒷거리)를 연상시키는 전시가 시작된다.

D 뮤지엄 , 전시실 1


십대의 반항, 일탈, 해방, 벗어나려는 욕망, 몸부림, 때로는 인생을 우회하고싶은 청춘의 비틀어진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 곳은  인적이 드문 후미진 폐공장 근처 철조망 사이로 난 공터에서 몰래 뻘짓거리?를 할 수 있는 청춘의 은신처에 숨어 든 기분이 일렁거린다.



벽면에 정갈하게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스케이트 보드의 실재 앞에서는 잠시 멍해지기도 했다. 보드에 몸을 실어 이리저리 내달리는 C. R. Stecyk lll 의 영상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바퀴의 마찰음이 아스팔트와 만나며 내는 소음마저 오로지 청춘들만의 소리 같았기에.



ROGER MAYNE, TEDDY BOYS, 1956


자유의 방종을 꿈꾸는 성장기의 청춘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행보를 밟는다. 미성년자에게 금기된 경험은 담배나 술로 인한 일탈이 가장 쉬운 경로 일 것이다. 십대들의 스릴, 동년배에게 묘한 위압감을 주는 일탈의 경험은 5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족적이 된 사진 앞에서 과감히 드러난다.


DEREK RIDGERS  < AT THE VORTEX CLUB, 1977 >


일명, 술취잠 : 술먹고 취해서 잠자기 - 나이가 들면 이런 소싯적 행동은 내 젊은 시절은 영영 가버렸다는 육체의 적나라한 슬픈 교훈이 남기에 금물이다.


DOUG DUBOIS


목표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는 것 조차 청춘에게 주어진 특권.


DOUG DUBOIS  < BONFIRE 1, RUSSEL HEIGHTS , COBH, IRELAND, 2011>


방황기의 청소년은 제자리로 돌아오든 아니면 갈 때까지 가든, 헤매다 영영 부유할 불안감과 외로움을 안고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에게 동병상련의 위로가 되는 동료, 친구를 찾기 마련이다.  먼훗날 저마다의 인생의 행로가 갈라져 한 치 앞을 모르는 불안정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위태위태하기에 더욱더 결집되는 강한 연대감이 생겨난다. 이렇게 끈적끈적한 제2의 분신으로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자리매김을 하기도 한다.


GOSHA RUBCHINSKIY  <TRANSFIGURATION SERIES, 2012>


개인의 역사에서 이미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감정을 새삼 불러 일으키는, 회상과 그리움으로는 표현 할 수 없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동경. 그것이 청춘의 기록이다.


Larry Clark <UNTITLED (KIDS) 1995 >


위는 Larry Clark 의 작품이다. 많은 관람객들의 발을 붙잡고 있던 이 작품 앞에서 자극적이고, 윤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적잖이 당황 할 부모세대의 어른도 있을 것이고, 소녀티를 벗지 않은 십대의 피사체를 엿보듯 촬영한 작가를 관음증 환자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래리 클락의 사진에서 꾸밈없는 날 것 자체가 주는 포악함과 진실의 마주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DASH SNOW <UNTITLED , 2004>


사진이 불쾌함을 주든 아니든, 이런 감정을 차치하고 필자는 그저 십대들도 성적으로 쾌락을 누릴 권리가 있다. 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청춘들의 탈선, 마약, 섹스, 자살을 가감없이 진실되게 담은 이 사진들은 허공에 답 없는 물음을 던질 뿐이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실제로 십대들이 우울, 자살, 섹스중독, 약물에 더 취약하고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도 하루에 수십명의 십대들이 자살을 한다. 식탁 위의 생선은 우아하지만, 막 잡아 올린 활어의 비늘은 불편하다.


Scott Campbell


유튜버들이 '좋아요'를 마구 눌렀을 법한 힙스터들이 모이는 핫플레이스에서 디제잉이 울리는 파티의 영상, 즉석에서 랜덤 문신을 해주는 Scott Campbell 의 퍼포먼스, Yung Lean의 랩, 팝아트적인 사진들의 나열... 이런 D 뮤지엄의 전시는 숨통 막히는 한국 학생들의 십대들이 누리는 청춘 문화와는 먼나라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청춘이 지난 우리들에게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니 열심히 누리고 즐겨라. 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역설적으로 동시대의 청춘에게는 그들에게 허락된 청춘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일깨워준다.


이광기  <내가 니를 어찌 키웠는데>


이런 서양인들의 눈에 담긴 청춘의 아우라가 마구 뿜어져 나오는 이 전시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학생들의 청춘을 떠올렸다. 얼마전 모 프로그램에서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청춘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데 그들이 대답한 청춘의 정의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실이었다.


"청춘이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데, 뭐든지 다 할 수는 없는 것"

"청춘이란 포기하는 과정이다… "라고 대답했던 청년들은 먹고 살기 힘든 현실에서 자신의 꿈이 불가능함을 깨달으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더랬다.


도대체 난 청춘인데 시간은 야속하다. 마냥 청춘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취업, 돈, 공무원 시험을 위해. 현실적인 꿈을 진작부터 정해놓고 부지런히 발빠르게 움직여야 살아남는게 이 사회의 청춘 시절이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들은 눈 깜짝할 청춘시절을 유야무야 보내고, 이십대 중후반에 이르러 녹록치 않은 꿈과 현실의 장애, 그것이 사회임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니.



파울로 코엘료 <스파이>


군데군데 파울로 코엘료의 구절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 전시의 큐레이터는 다각적인 시각으로 청춘을 보고 느끼고 열망해보고 다시 돌아 갈 수 있는 순간의 기분을 느껴보고, 현재의 청춘들과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서른중반의 나이인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해야한다’ 와 ‘하고싶다’의 갈등속에서 절제와 인내, 노력으로 버텨내야 하는 경쟁의 삶이 내 청춘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제대로 된 문답조차 할 수 없는 쳇바퀴 도는 갑갑한 일상. 내 자신만 잘 버티면 경제난, 취업난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책상앞에서 이런 막연한 꿈을 꾸던 여고생. 세상을 잘 모르기에 과감히 던질 수 있는, 지금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그런 용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삼십대에게 청춘은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들고 미온의 열감이 손끝에 머물고, 붉은 잔상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는 나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푸른 봄 철을 뒤로 하고 서서히 수분이 증발하는 여름철로 접어든다고 멋대로 해석을 해본다면 삼십대는 결실을 이루기에는 미성숙한 단계다. 그렇다면 ‘청춘’과 ‘황혼’의 중간인 삽십대에는 무엇이 있을까? 삽십대에게 청춘은 완전히 저물지 않아서 손에 닿을듯, 잡힐듯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는 공허함 때문인걸까. 이 상실감을 이겨내기엔 아직은 이르고, 또 청춘이라 하기엔 늦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공자는 30세를 모든 기초를 두는 나이로 이립(자립) 이라 했고,

40세는 불혹(不惑)으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미혹되지 않을) 나이라 말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공자는 청춘시절과 20대에는 이립(자립)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한껏 미혹되는 시기임을 인정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마저도 용인되는 시기.

그게 바로 청춘이니까.




PART 2. 

전시실 위층으로 올라오면 밝은 조명아래 찬란한 젊음의 순간을 찬양하는 전시가 이어진다.



청춘이란 애시당초. 겪는자에게도 지나간 자에게도 신기루 였다. 



흔히들, 청춘이 지나간 그 상실의 빈자리를 통감하고서야 비로소 청춘이 아름다웠다.. 말한다.


그렇기에 청춘인 당신이라면 그게 뭐가 되든,  더 격렬하게 느끼고, 사랑하고, 움직이고 넘어져야 한다. 그것이 청춘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라이언 맥긴리 


열흘 붉은 꽃은 없다 했다. 


젊음이 주는 그 물리적인 찬란함은 결국 시들지만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것은 모든이들에게 누릴 수 있는 권리기에 한껏 보며 취해서 그 감정을 내 안에서 불러 일으켜보자고.

청춘으로 열병을 오래전 앓아보았던 이들이 몸으로 기억해내는 그리움은 나를 깨운다. 

그것이 시간의 텃세에서 오는 자유로운 젊음이다.

그렇기에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사막에서 신기루를 열망하듯. 

청춘을 기억해내고 되살려야 한다. 



<YOUTH-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전시가 끝날 무렵 미세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손 끝에 닿자마자 사그라드는 순간의 불꽃이 내 안에서 피어오르듯. 전시회를 뒤로 하고 걸어나오는 발자욱은 가볍고 경쾌했다. 이제 못다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된다. 

청춘이 지나간 자리에서 비로소 써내려가기 시작한 우리들의 책장의 서문을.




글쓴이 : 이윤진 (YoonJ)



장소 : D 뮤지엄

전시 일정 : 17.2.9 - 5.28

http://www.daelim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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