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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윤 Dec 14. 2021

사라진 도티기념병원을 기억하다

은혜 은(恩), 고를 평(平),​ 은혜가 고른 은평(恩平) 역사

내 기억 속 은평은 불광동에서 시작된다. 유년시절, 관직에 계셨던 큰 외삼촌댁이 불광동에 있었는데 오래전이지만 아주 독특한 구조의 집과 넓은 마당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두 번째 기억은 큰 외삼촌의 둘째 딸인 나의 외사촌 언니의 신혼집이 있던 역촌동으로 이어진다. 솜씨 좋은 사촌 언니는 우리를 위해 뚝딱 칼국수를 끓여 내왔다. 언니는 빠듯한 신혼살림을 꾸려가던 터라 근사한 한 상차림으로 맞이하지 못하는 것을 내내 속상해했지만 사촌 언니의 칼국수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있었다. 엄마의 둘째 외삼촌 집도 대조동에 있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도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던 나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그 집에 갔고, 그 집 마당의 주렁주렁 대추가 열린 나무가 기억난다.


▶ 따뜻한 은평의 기억들


2009년 서울특별시립 서북병원을 찾아가면서 은평과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 병원 대상으로 컨설팅과 교육사업을 하고 있는 나는 서북병원 관계자의 요청으로 서북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무실이 있는 강남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온 은평은 참 먼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추억으로 가는 여행길 마냥 설레었다. 택시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불광동, 역촌동 안내 표지판을 지나치고 생소하면서도 예스러운 지명의 역말 사거리를 지나 어느 산자락에 위치한 서북병원에 도착했다. 서울 같지 않은 생경한 느낌 속에 위치한 서북병원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서북병원은 그동안 내가 접해왔었던 병원들과는 많이 다른 병원이었다.



1948년 10월 시립 순화 병원으로 시작한 서북병원은 1964년 5월 서울특별시립 서대문 병원으로 이름을 바꿔 문을 열었다. 1973년에는 시립마포 병원을 흡수·통합하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병원 신축공사를 마치고 2005년 시립서북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9년 ‘서울특별시 서북병원’으로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법정 제1군 감염병(콜레라, 페스트,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디프테리아, 세균성이질, 황열) 및 제3군 감염병(결핵, 성병, 나병, 만성 B형 간염) 중 결핵환자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수도권 유일의 특수 공공병원이 자 서울시가 최초로 건립한 노인·치매질환 전문진료 특화병원이다.



서북병원은 2009년 보건복지가족부의 말기 암 완화 의료기관으로 지정되면서 병원 위상과 규모에 걸맞은 내적 성장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나는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일 때문에 은평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오가는 길에 내 호기심을 끄는 안내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바로 ‘도티기념병원’이다.


▶ 도티기념병원,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름


‘도티기념병원’이란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된 건 언론 보도를 통해서다. 2017년 6월 29일 감사 미사를 끝으로 도티기념병원이 문을 닫자 도티기념병원에 대한 뉴스와 기사가 쏟아졌다.* 2009년 서북병원을 찾았을 때 도티기념병원을 처음 알게 되었고 얼핏 자료들을 찾아보다 ‘나중에 한번 가봐야지’ 하고 마음에 담아 두었다. 2017년 은평을 이사 온 후에도 여유가 좀 생기면 찾아가려고 했는데 미처 가보기도 전에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아쉬웠다. 그런데 2020년 은평 로컬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저 찾아가 보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도티기념병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한 답답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도티기념병원은 사라졌지만 나는 ‘도티’가 누구이며 ‘도티기념병원’이 어떻게 은평에 생기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알로이시오 신부를 만나다



             알로이시오 슈월츠 (한국 이름: 소재건(蘇再建)) 몬시뇰(Msgr.) [사진출처] 위키백과  



‘도티기념병원’에 대해 자료조사를 시작하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름이 있었다. 한국 이름은 소재건, 미국 출생 알로이시오 슈왈츠(Aloysius Schwartz) 신부이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이들의 사제가 되기를 원했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1957년 워싱턴 대교구 성 마르틴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한국의 상황을 듣고 선교사제가 되어 주저 없이 부산으로 왔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산교구 송도 본당의 주임 신부로 재직하면서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병들고 굶주린 채 의지할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1964년에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마리아수녀회를 창설하고 이 소명에 전념하기 위하여 5년 동안의 송도 본당 주임 신부

직을 사임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는 4백50여 명의 고아와 7백50명의 걸인·행려자들을 수용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고, 관리하던 깡패들이 심한 학대와 매질을 일삼아 원생이 죽기까지 하는 ‘영화숙’이 있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진료소를 개설하여 노역으로 병들거나 폭행으로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영화숙 수용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납치하여 죽이겠다는 영화숙의 위협에도 알로이시오 신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공식 ‘소년의 집’을 설립하였다. 영화숙 아동들을 ‘소년의 집’으로 데려와 보호하면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도 받을 수 있게 했다.


제12,13대 김현옥 관선 부산 직할시장은 1966년 제14대 서울시장으로 발탁된다. 부산에서 알리이시오 신부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에도 같은 시설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알로이시오 신부를 직접 청와대로 불러 서울에도 ‘소년의 집’을 세워 달라고 요청했고 알로이시오 신부는 고민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로이시오 신부, 서울시청 방문 [사진출처] 서울사진 아카이브



1975년 1월 1일 은평구 백련산 자락에 마리아수녀회와 함께 ‘서울시 소년의 집’을 개원하였다. 알로이시오 신부와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은 거리를 헤매던 ‘서울 시립아동보호소’의 800명 아동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가장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제17대 박영수 서울시장으로부터 서울 시립 갱생원의 운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부산시장 재직 시절부터 알로이시오 신부를 눈여겨보아 온 박영수 서울시장은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부랑인 시설 서울 시립 갱생원의 운영자로 알로이시오 신부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기록, 1961년 10월 12일 시립 갱생원 개원식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알로이시오 신부는 처음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여 망설였으나, 갱생원의 실태를 자세히 알고 나니 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61년 서울시 중구 주자동에서 현 구산동으로 이전한 서울 시립 갱생원은 시립이었지만 실제로는 11명의 깡패 동장이 1,200명의 원생을 지배하며 착취하고 있었다. 깡패 동장들은 원생들을 사주해서 기물과 창문을 부수고 흉기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게 했다. 그 와중에 알로이시오 신부는 부상까지 입게 되지만,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뜯어먹는 사람들에게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라며 결국 원생들을 구해내고 마리아수녀회 갱생원을 개원한다.



               1984년 05월 30일 마리아수녀회 갱생원 개원식 [사진출처] 서울사진 아카이브



       가난한 환자들의 안식처, 도티기념병원의 탄생



서울시 소년의 집 아이들 중에는 서울 시립 아동보호소에서 올 때부터 영양실조와 정신장애, 지체장애를 겸한 복합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고,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녀들은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시내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대부분 병원 접수창구에서 직원들의 불친절과 무관심 때문에 하염없이 기다리다 의사도 만나지 못한 채 다시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돌아오는 일이 적지 않았다. 서울 시립 갱생원 원생들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복합질환을 앓고 있거나 질병상 이자이거나 알코올중독자인 원생들이 박대를 당하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어느 병원에 가든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이 따뜻이 영접받고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선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더 이상 서울시 소년의 집 아이들과 서울 시립 갱생원 원생들이 치료를 구걸하러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알로이시오 신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미국인 사업가 조지 E. 도티(George E, Doty) 씨에게 병원 설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골드만 삭스의 대주주이자 포담대학교(Fordham University) 이사장이기도 했던 도티 씨는 그의 부인과 함께 197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헌신하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선뜻 1백만 달러를 희사하였다. 1982년 6월 29일 은평구 백련산 자락 서울 시립 소년의 집 부지 안에 70 병상 규모의 병원이 세워지게 되었고 도티 씨의 뜻을 기리기 위해 병원의 명칭을 ‘도티기념병원’으로 정했다. 


‘도티기념병원’은 서울시 소년의 집 2,500여 명의 아이들과 서울 시립 갱생원의 1,500여 명의 환자들 진료만으로도 연일 북적거렸다. 하지만 도티기념병원은 “도시 영세민들에게 무료 의료혜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라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뜻에 따라 중증 장애인, 부랑인,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무료 자선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병원 초창기에는 수녀들은 가난한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병원을 알려야 했다. “공짜가 어디 있느냐"라며 의심하던 이들도 외래진료비는 물론 수술비, 입원비까지 모두 무료이고, ‘무일푼’으로 병원을 찾아도 ‘귀빈 대접’을 받고 의료보험증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에 환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2017년 6월 28일, 마리아 수녀회 도티기념병원 [사진출처] 은평시민신문



도티기념병원의 숭고한 박애 정신에 감동한 의료진들의 동참도 이어졌다. 서울대, 이화여대, 가톨릭대 등 국내 유수의 대학 출신의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7명의 의사가 주축이 되어 70여 명의 간호사, 약사, 수녀 등과 함께 각종 암 환자, 백혈병 환자까지 치료를 했다. 대학병원에서는 여러 명의 의사가 함께 해야 하는 어려운 수술도 한 명의 의사가 혼자서 해내야 하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휴무도 없이 진료를 봐야 했지만, 환자를 돌보는 인술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의료진과 수녀들은 서울 시내 산부인과를 찾아다니며 낙태하려는 산모를 데려와 출산을 돕고 신생아들을 인큐베이터에서 살려 내기도 했다. 도티기념병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돼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로 찾아오고, 치료를 받았던 환자가 한 달 치 월급을 선뜻 내놓고 가기도 하고, 이곳에서 백혈병이 완치된 환자는 간병인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기도 했다. 병원을 찾아와 고마움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도티기념병원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병원이 될 수 있었다.



                 도티기념병원의 아름다운 퇴장



도티기념병원이 35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병원의 문을 열어 섬김과 나눔으로 치유의 기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동안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뤄냈고,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도티기념병원을 지원해 온 마리아수녀회의 해외 후원자들은 한국의 경제 수준에 걸맞게 이 일을 정부에 맡기고 마리아수녀회는 한국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고아들과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전념해 주기를 원했다. 


2012년 도티기념병원은 주변 개인병원 원장들에게 고발을 당하게 된다. 도티기념병원의 무료 운영이 지역 병원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였다. 결국 도티기념병원은 현행법상 환자의 본인 부담금을 면제해 주거나 할인해 주는 것은 위법이니 환자들에게 본인 부담금을 받으라는 행정명령을 받게 된다. 적은 금액이라도 환자들에게 치료비를 받으면 무료 자선병원이라는 도티기념병원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일이었다. 사회환경 변화로 환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어 병원의 존속을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마리아수녀회는 도티기념병원을 서울시 꿈나무마을의 의무실로 전환하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소명을 내려놓기로 결정한다. 


“도티 병원에서만은 가난한 사람들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운영하십시오.”라는 알로이시오 신부의 말에 따라 우리나라 극빈층을 위한 의료 역사의 한 부분을 감당했던 ‘마리아수녀회 도티기념병원’은 2017년 6월 15일 필리핀 산모의 아기를 마지막으로 받아내며 35년 사랑의 진료를 무사고로 마무리하고, 2017년 6월 29일 고별 미사를 끝으로 은평에서 아름다운 퇴장을 하게 되었다. 


1982년 6월 29일부터 2017년 6월 29일까지 3,300만 명의 국내 환자들과 99개국 52,000명의 외국인 환자들이 도티기념병원에서 치료받았고, 8,400명의 신생아들이 태어났다. 또한 세상의 따가운 눈총과 환경 때문에 출산을 포기하려던 미혼모 5,000명이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마리아수녀회 은평대상 수상 [사진출처] 마리아수녀회 사진 갤러리



                2020년 은평을 떠나는 마리아수녀회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영향으로 많은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서 서울로 이동했다. 인구 집중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고 거주지가 아니었던 서울 외곽지역에도 서울로 유입된 사람들이 무허가로 정착촌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1960년대 이전에는 근교농업지대의 성격을 띠었던 은평구도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진행된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라 대단위 주거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지에 회사와 금융기관이 집중되면서 도심지에 위치하고 있던 시설들은 서울 외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서울시 중구 주자동에 있던 서울시 아동보호소는 1975년 ‘서울시 소년의 집’으로 은평구에 자리를 잡았고, 2010년 다시 ‘서울시 꿈나무마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울시 중구 주자동에 있던 ‘서울 시립 갱생원’ 역시 1961년 은평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1996년에는 ‘서울 시립 은평의 마을’로 명칭이 바꾸게 되고 2005년과 2007년에는 중증 장애인 요양 시설인 ‘평화로운 집’과 정신 요양 시설인 ‘은혜로운 집’으로 각각 기능을 분화해 부랑인과 장애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은평의 엄마로 은평을 지켜온 마리아수녀회가 2020년 12월 31일 ‘서울시 꿈나무마을’의 44년 위탁운영을 종료하고 은평을 떠난다. 마리아수녀회는 이미 2018년 12월 31일 30년 동안의 은평의 마을 위탁운영을 포기해야 했다. 1975년 알로이시오 신부와 함께 은평으로 왔던 수녀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뒤를 이를 수녀가 부족한 데다 외부의 운영경비 지원마저 끊겼기 때문이었다. ‘서울시 꿈나무마을’을 떠나는 이유도 수녀들의 고령화로 ‘엄마 소임’을 이어가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입소자 수백 명이 단체로 숙소에서 지내는 ‘서울시 소년의 집’ 집단생활방식은 청산해야 할 과거 유산으로 취급을 받고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후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입소아동이 줄어들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 문을 닫는 소규모 양육시설들은 늘어나게 되었고, 서울 시내에서 발생하는 미아와 기아를 거의 대부분 수용하는 소년의 집은 이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잇따르는 공격 속에 ‘서울시 소년의 집’은 소년의 집이 범죄소년·촉법소년·우범소년을 보호하는 소년원을 연상시킨다며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서울시는 상금 100만 원을 걸고 새 이름을 공개모집했고, 소년의 집은 지금의 ‘꿈나무마을’이란 새 이름을 달게 됨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 축소와 입소아동 감소* 속에 바로 옆에 위치한 응암 제2 구역에서 추진된 대규모 재개발사업은 꿈나무마을에 또 다른 시련을 안겨주었다. 관할 교육청인 서부 교육지원청과 서울시가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응암 2 구역 내 중학교 건립 계획을 취소하자 일부 조합원이 ‘꿈나무마을 안에 새 중학교를 지어야 한다’며 서울시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꿈나무마을 부지 안에 중학교가 생기면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입소 아동들은 한창 예민한 시기에 심리적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꿈나무마을의 동의 없이 부지 안에 학교를 짓지 않겠다고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밝혔지만, 불씨는 남아있고 현재는 꿈나무마을의 존속마저 불안한 상황이다.


* 1975년 개교한 서울 소년의 집 국민학교(12 학급 720명)는 2003년 알로이시오 초등학교로 개명, 2015년 40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44년 동안 마리아수녀회 140여 명의 수녀들은 영유아부터 초, 중, 고등학생 1만 4천 명의 아이들을 부족함 없이 키워냈다. 마리아수녀회의 설립자인 알로이시오 신부가 살아생전 늘 했던 말은 “조금만 더…”라고 한다. “조금만 더 참을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친절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만 더…”라는 뜻을 담고 말이다. 은평을 떠나는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의 바람 역시 ‘조금만 더”이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나누고, 그렇게 해서 힘든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도티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시작한 여정 속에서 나는 알로이시오 신부를 만나고, 마리아 수녀회 수녀들을 만나고, 도티기념병원의 의료진들을 만나고, 이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한 사람들을 만났다. 사회로부터 내몰린 사람들을 사랑으로 지키기 위해 오래전 은평을 찾아온 사람들이 이제 사랑의 기억만을 남기고 은평을 떠난다. 소임을 다해서 그들이 떠나는 것인지 쓸모가 다해서 사회가 내모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이름 하나로 시작된 이 기록이 은평 곳곳에 남기고 간 그들의 사랑의 역사로 남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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