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야 죽지마 ㅠㅠ
그럴싸한 장난감 하나 없이, 나는 유년을 보냈다. 하지만 - 옆 집 아이의 공주 인형은 가끔 진심으로 부러웠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이 심심했다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점심 시간에는 친구들과 편을 나누어 땅바닥에 금을 긋고 하는 온갖 놀이를 했고, 방과 후에는 책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들판으로 산으로 쏘다니다 보면 하루 해가 짧았다. 저녁에는 학교에서 빌려온 책을 읽거나 티비를 보았고, 가끔은 언니들과 뭔가를 끝없이 지어내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놀이라는 건 어떤 '설정'으로 시작되는데 보통 큰언니가 재밌게 읽은 어떤 책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곤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언니가 '15소년 표류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그걸 배라고 하고 우리도 표류기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각자가 뭔가 지어내고 덧붙이다 보면 이야기는 한없이 방대해져 갔고, 몇 시간동안 우리는 온갖 섬을 돌아다니며 신기한 동식물과 진귀한 보물을 발견하는 모험을 완성했다.
그렇게 우리의 방바닥과 이불은 가끔은 사막을 건너는 대상의 낙타가 되기도 했고 또 가끔은 우주탐사선이 되기도 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신비한 느낌을 내고 싶어서 사전을 펼쳐 생소하고 멋져보이는 단어를 찾아 새로 발견한 행성의 이름이라고 치며 국어 사전을 꼼꼼히도 읽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반복해도 매번 조금씩은 다른 이야기가 되니까 언제나 새로운 질리지 않는 놀이들이었다.
그런 놀이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특이한 것은 역시 '고래 살리기'인데, 이 놀이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큰언니가 갑자기 '고래'가 되는데 이 고래는 땅바닥에 머리가 닿으면 죽는다는 것이 주된 설정이다. 머리가 바닥에 닿지 않게 하려면 작은언니나 내가 무릎 베개를 해줘야 했는데, 그 상태에서 큰언니는 우리를 놀리려고 일부러 힘을 주어 열심히 머리를 떨구려고 했다. 잠깐이라도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아파서 죽어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고래는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죽어....."라고 말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우스워 죽겠지만 그 때는 너무 진지하고 심지어 다급해서 언니의, 아니 고래의 머리를 있는 힘을 다해 들어올리려 하곤 했다. 하지만 이미 '고래 살리기'가 아니라 '막내 놀리기'가 된 놀이는 언제나 슬프디 슬픈 고래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죽어가는 고래, 아니 큰언니의 입술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리면 작은 언니는 포기하고 이건 놀이에 불과하다 선언하며 현실로 돌아갔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져 더 힘들어진 나는 참았던 눈물을 서럽게 터뜨리며 고래를 포기하곤 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슬퍼서 매번 대성통곡으로 끝나는데도 매번 한없이 "고래야 죽지마."를 외치며 애태우던 기억. 차례로 찾아 온 사춘기에 각자의 성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 저마다의 외로움을 그저 혼자서 견디기 전에, 가끔 그렇게 죽이 맞아 보냈던 우리 세 자매 나름의 특별한 추억. 언니들도 나처럼 기억하고 있을까? 오늘은 한 번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