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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코치 Apr 16. 2023

시작하기, 결정하기, 끝내기

20여 년 전에 나는 작은 컨설팅 회사의 대표였다. 당시 회사는 A통신사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A사와와 처음 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경험이 많은 김 부장에게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겼고, 나도 매일 아침 A사로 출근해서 고객과 회의를 하거나 일의 진행을 체크했다.


김 부장은 일을 참 잘 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일의 목표, 접근 방법 정도만 이야기해 주었다. 이후 김 부장이 팀원들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고 정보 수집, 분석, 고객과의 소통, 보고서 작성 등의 컨설팅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과정을 능숙하게 이끌었다.


첫 중간 발표를 하기로 한 전날 아침에 프로젝트 사무실로 출근한 내게 김 부장은 발표할 보고서를 검토해 달라고 내밀었다. 찬찬히 읽어보았다. 완벽했다. 틀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정도만 눈에 띄었다. 그래도 대표가 도움이 좀 되어 주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돌려주기도 미안했다. 고칠 부분을 억지로 찾아 고쳐 보았다. 굳이 고쳐 보았어도 처음에 김 부장이 쓴 것이 더 나았다.


김 부장에게 보고서를 돌려주며 “잘했어. 김 부장이 이제 다 알아서 해도 되겠다.” 하면서 내가 할 일이 없는 거 같다고 덧붙였다.


“아닙니다. 대표님이 다 됐다고 결정해 주셔야 일이 끝나죠. 끝났다고 결정해 주시는 게 대표님 역할이시죠.”


아, 그렇구나. 끝났다고 결정하고 말을 해야 일이 끝나는구나. 김 부장의 한마디는 리더로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했다.


리더의 역할이 무엇일까? 부서의 비전을 만들고 구성원을 동기부여 한다? 모두 맞다. 그렇지만 비전을 만들고 동기부여를 하는 것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대표님께 보고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즉 시간이 정해진 일이 아니다. 조직에서 일하는 리더와 구성원의 일은 구체적인 목표와 기한이 정해진 프로젝트나 태스크(task)가 더 많다. 이런 일상에서 리더의 역할은 무엇일까?


업무에서 리더의 첫째 역할은 ‘시작하기’이다. 많은 업무가 리더가 지시하는 형태로 시작된다. 물론 지시가 없어도 구성원이 알아서 시작하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업무도 있다. 예를 들어, 인사팀의 급여 담당인 이 대리는 팀장의 지시가 없어도 매달 전 직원의 급여를 계산해서 지급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수당의 도입을 검토하는 일은 팀장의 지시가 없이 시작하지는 않는다. 물론 리더의 지시는 없지만, 자발적으로 ‘팀장님, 이런저런 일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하는 직원도 가끔 있다. 정말 이쁘다. 크게 될 직원이다. 그런데 드물다.


리더의 두 번째 역할은 ‘직접 하기’이다. 직원이 해도 되는 업무를 리더가 혼자서 또는 직원과 같이 수행하는 경우이다. 영업사원으로 담당하던 큰 고객사 한두 곳을 영업팀장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맡는 것이 이런 예이다. 일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궁금해하는 리더들이 이렇다.


리더의 세 번째 역할은 ‘도와주기’이다. 업무를 지시받은 직원에게 업무 지식이나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해 주거나 도와주는 것도 리더의 할 일이다. 부서 내의 최고 전문가는 부서장인 경우가 많다. 경력이 길지 않은 직원이나 그 업무를 처음 해 보는 직원에게 부서장은 최고의 선생님이다.


리더의 네 번째 역할은 ‘결정하기’이다. 업무 과정에서의 주요 결정 또는 마지막 결론이나 결정은 리더가 한다. 물론 업무를 진행하면서 부딪치는 작은 결정은 구성원이 직접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업무의 최종 결정은 리더가 내린다. 예를 들어 신제품 원가의 30%를 차지하는 핵심 자재를 공급할 협력업체를 선정한다고 하자. 해당 자재를 만드는 많은 회사 중에 협력업체 후보를 선정하는 것은 담당자가 한다. 선정 기준에 따라 협력업체 후보를 평가하고 가격을 협상하는 것까지도 담당자가 한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공급사를 어느 회사로 정하느냐는 것은 담당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팀 차원에서, 즉 구매팀장의 이름으로 결정한다.


구성원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 의견이 엇갈리면 다수결로 정할 때도 있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다) 결론은 부서장이 내린다. 부서장의 상사가 ‘이거 누구 생각이야?’ 하고 물었을 때 ‘제 생각은 달랐는데 직원들이 이게 좋다고 해서...’ 하고 말하는 부서장도 가끔 있다. 그 자리에 오래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리더의 마지막 역할은 ‘끝내기’이다. ‘좀 두고 봅시다.’ 또는 ‘더 생각해 보자.’고 하면서 일을 끝내지 못하고 질질 끄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일을 끝낼 줄 아는 리더는 ‘여기까지 합시다.’ 또는 ‘더 조사해 보고 사흘 후에 다시 모여서 결론 냅시다.’ 하는 리더이다.


일이란 끝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끝내자고 선언하지 않으면 계속 일하게 된다. 끝내라고 리더가 결정해 주지 않아서 일이 계속되면 구성원은 지치게 되고 시간과 돈이 낭비된다. ‘될 때까지 한다.’는 구호가 있다. 이 ‘될 때’가 언제인지 명확하게 정해주지 않는 리더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구성원이 힘들까?


A사 프로젝트를 할 때 나는 왜 김 부장에게 내가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고 했을까? 당시에 나는 리더로서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직접 업무를 하거나 도와주지 않으면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말한 리더의 역할 중 두 번째 ‘직접 하기’와 세 번째 ‘도와주기’에 치중하고 있었다.


많은 리더가 업무를 직접 하지 못하거나 최소한 부하를 도와주지 못하면 불안하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리더가 되었어도 부서장이 아닌 부서원의 마인드에 아직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것만이 기여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밥값’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서원 마인드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경우는 전문가 마인드이다. 바로 내 경우이다. 컨설턴트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조언을 하거나 정보를 준다. 나는 컨설턴트로 10년을 일하다가 기업으로 옮겨 경영자가 되었다. 기업으로 옮겨서도 컨설턴트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해 봐서 아는데’를 남발하고는 했다.


리더는 ‘직접 하기’와 ‘도와주기’의 역할보다 ‘시작하기’, ‘결정하기’, ‘끝내기’의 역할에 더 집중해야 한다.

‘직접 하기’와 ‘도와주기’는 리더가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시작하기’, ‘결정하기’, ‘끝내기’는 오롯이 리더의 일이다. ‘직접 하기’는 구성원이 더 잘 하는 일이고, ‘도와주기’는 리더가 아닌 동료나 전문가들도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일을 시작하고 결정하고 끝내는 것을 종합해서 표현하면 ‘일을 책임지는 행동’이다. ‘일을 책임진다’고 하는 것은 일이 실패하면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 아니다. ‘책임진다’는 것은 일에서 성과를 내고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일하겠다는 의미이다.


A사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끝났다. 고객사 임원은 만족해했다. 특히 대표가 매일 고객사에 들러서 프로젝트를 꼼꼼히 챙기는 열의를 보여 주었다고 고마워했다. 아침이면 김 부장과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농담따먹기나 하고 있었던 나는 뜨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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