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사의 인사를 총괄하는 김 부사장은 일주일 전에 입사한 이 상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상무는 국내 회사인 B사에서 이십 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고 외국계 회사인 A사에 입사했다. 김 부사장은 이 상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자신이 도와줄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같이 점심을 하기로 했다.
노크 소리가 나고 김 부사장의 비서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부사장님, 사장님이 같이 점심 하실 수 있는지 여쭤보시는데요?”
“오늘 이 상무와 점심 같이 하기로 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이 상무는 당황했다.
“부사장님, 사장님이 점심 하자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죠. 저랑은 다음에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 상무와 같이 해야죠.”
“그래도 사장님이 찾으시는 걸 보니 하실 말씀이 있는 거 아닐까요?” 이 상무가 말했다.
“제가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걸 비서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비서는 제가 약속이 없다고 생각하고 점심이 가능한지 물어본 겁니다. 제가 이 상무와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걸 비서가 알았다면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사장 비서께 선약이 있다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김 부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상무, 우리 회사에서 일할 때 이걸 알아 두세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은 선약입니다. 저는 오늘 이 상무와 점심 하기로 했으니 사장님이 찾으셔도 이 상무와의 약속이 더 중요합니다.”
김 부사장의 말을 듣고 이 상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무가 일했던 B사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원들과 점심을 먹기로 했어도 예정에 없던 대표의 점심 호출을 받으면 팀장은 ‘다시 점심 일정을 정합시다.’ 하고 대표에게 뛰어가는 게 상식이었다. 협력업체와 미팅 후에 같이 점심을 하기로 했을 때도 갑자기 대표가 부르면 부서 고참이 모시고 점심을 하도록 하고 팀장은 대표와의 점심에 참석했다. 유일하게 대표의 점심 호출을 면할 수 있는 경우는 고객과의 약속이었다.
어떻게 조직의 문화를 알 수 있을까? 사무실 인테리어의 분위기나 직원들의 옷차림에서도 조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누가 회의에서 발언을 가장 많이 하고, 누가 회식에서 고기를 굽는지를 보아도 조직 문화를 알 수 있다.
조직의 문화를 판단하는 방법은 구성원이 어떤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삼는 기준이 무엇인지 관찰하는 것이다. 즉, 상황에 대한 태도, 즉 일과 관계에 대한 직원의 태도가 그 회사의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자. 사업 초기에는 이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사업 투자를 검토하는 회사는 성장 지향의 문화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사업 초기라고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에 사업은 무조건 이익이 나야 한다는 원칙을 가진 회사는 이익 지향의 문화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B사는 팀원과의 점심 약속보다 예정에 없던 사장님의 호출이 더 우선시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내부적으로 상사 지향의 문화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객과의 약속이 있을 때 사장님 호출이 면제된다면 외부적으로는 고객을 중시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협력업체를 모시는 방식을 보면 고객의 중요도에 따라 고객에 대한 대접 역시 달라지는 듯하다.
앞에서 문화는 구성원의 태도라고 했다. 구성원의 태도를 이끄는 것은 리더의 태도이다. 리더의 힘이 강할수록, 즉 리더가 직급이 높을수록 태도에 미치는 영향은 커진다. 대표나 회장의 말과 태도는 회사의 문화를 만들고, 부서장의 말과 태도는 부서의 문화를 만든다. 예정에 없던 점심식사를 요청했을 때 부하직원이 당연히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B사 대표의 태도가 예정에 없던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신입사원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부서장의 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구성원들은 대표님이나 회장님의 태도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표님이나 회장님만 리더가 아니다. 중간관리자들도 작은 것에서 회사의 문화와 구분되는 부서의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정 팀장은 팀장을 맡은 이후 팀의 문화를 수평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 이를 계속 강조해 왔어도 팀원들은 아직도 선후배 사고에 사로잡혀 막내 신입사원이 부서의 대부분 잡일을 하고 있었다. 정 팀장은 두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규칙은 ‘돌아가며 한다.’로 정했다. 그래서 정수기 물통 교체하는 일과 화분에 물 주는 일은 한 달에 한 사람씩 가나다순으로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순번에는 물론 정 팀장도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규칙은 ‘잘하는 사람이 한다.’이다. 회식 때 고기를 굽는 일은 막내가 아니라 전사에서도 고기를 잘 굽는다고 소문난 오 차장이 하기로 했다.
정 팀장도 점심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갑작스럽게 팀원들에게 ‘오늘 같이 점심이나 할까?’ 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혼밥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라고 한 박 코치의 말이 생각났다.
그건 사장님이나 회장님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정 팀장은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