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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구집아들래미 Nov 30. 2019

포용의 부재.
조커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영화 <조커 Joker> 리뷰, 포용 도시의 필요성

찝찝함. 영화 조커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 저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실제로 있을 법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더 극대화되었으리라.


포용적이지 않은 도시에서, 조커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영화에서도 나타났듯 조커는 1명에서 소수로, 소수에서 다수가 되어간다. 차별과 심리적 빈곤이 일상이 되어버린 고담 시티에서 조커의 등장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포용적이지 못한 도시 었기 때문이다. 조커(아서 플렉)는 차별과 질환 속에서도 나름 최선을 다한다. 스스로 직업을 가지려 하기도, 사랑을 하고, TV 쇼에 나가는 꿈도 꾸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 하기도.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아서 플렉은 깨닫는다.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차별과 빈곤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있다고.'


긴 글을 앞 서 요약하자면, 포용성(Toralence)은 오늘날 도시에서 중요한 요인이다. 다양성(Diversity)을 높이는 윤활유 역할을 하고, 인재들의 도전을 장려하여 산업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나은 도시로 나아가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이 글은 사실 영화 조커보다는, '포용도시'에 포커싱된 글이다. 조커에 관한 훌륭한 리뷰가 너무도 많기에. 그리고 이를 보면서 포용도시가 지닌 의의를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기에.


“도시 공간의 진보화 혹은 민주화”

개인적으로 포용 도시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도시 공간이 한층 더 민주화/진보화된 도시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정치적인 색깔이 물씬 풍기는 정의이기 때문일까, 관련 논문과 사설에서는 ‘민주화/진보화’라는 단어를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각각의 글에서 저마다의 포용 도시에 대한 정의를 분명하게 내리고 있지만, 포용 도시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만이 분명해 보였다. 노인이건, 외국인이건, 돈이 많건, 적건,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없도록 노력하거나, 실현된 도시를 포용 도시라고 한다. 자유자본주의 사회 공간 위에서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소수에 대해 배려하여 공공선(복지)을 실현하는 것. 진보와 민주화만큼이나 이런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었다.


 “문제, 차별은 공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조커 joker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기에 개봉하여 한국에서도 히트를 친 ‘겟 아웃’이라거나, 작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음악상’을 수상한 ‘차일디쉬 감비노의 This is America’ 모두 미국 내 흑인 사회의 문제점과 차별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이처럼 melting-pot의 대표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 내에 조차도 인종 간의 차별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성별/소득/나이/학벌 등 분야만 다를 뿐이다.


사례는 조금 다를지라도, 민족과 문화에 따라 공간적 분화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대도시라면 꼭 하나쯤은 있는 공간, ‘차이나 타운’을 보면서 알 수 있다. 부산/인천에도 크게 있으며, 서울에서는 중국 동포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대림동 일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리틀 이태리’ 라거나, 무슬림·유대인 마을이 큰 도시마다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게토(ghetto)라고 한다. 이는 인종(혹은 국가적)적 요소에 따라 공간이 분화된 것으로, 개인적으로 차별(혹은 자발적 밀집)이 공간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발적 밀집과 차별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이루어진다.


 “포용하지 않는 도시,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적으로 생각하였을 때, 도시가 포용성이 없을 때 지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포용성(tolerance)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핵심 요소다. 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 배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와 도시는 도태된다. 토론토 대학의 교수, 리처드 플로리다는 유명한 저술서 「도시의 창조계급」에서, 실리콘 밸리의 성공적인 창업 생태계는 바로 ‘다양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물론, 스탠퍼드와 UC버클리 등 우수한 교육 환경과 인적 Pool, 온화한 기후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전체적으로 포용성이 매우 높음을 보여준다. 포용성이 높은 도시에는 인재들(창조계급)이 몰리기 마련이다.


 두 번째로, 포용성이 없는 도시는 기회가 매우 적다. 이는 능력이 있는 인재라 할지라도 도시에 포용성이 부족하다면 손에 쥘 수 있는 기회가 매우 적음에 분노할 것이다. 또한 해당 인재가 도시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제한적으로 만들게 된다. 또한, 늙은 사람이라 해서/혹은 동양인이라 해서 의견을 무시하거나, 차별받는 느낌이 들게끔 한다면 그들은 위축되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포용 도시의 필요 요건으로 상호의존성이나 참여가 중요한 이유이다.)


 세 번째로, 심리적 빈곤은 이 순간으로 끝이 아니라, 악순환을 낳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과 생각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어쩌면 결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의 입에서 ‘휴거(휴먼시아 거지)’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은, 부모의 영향이 크다. 실제로 뉴스를 통해서, 부모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랑은 친구 하지 마라고 했다는 아이의 인터뷰를 보았다. 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암묵적으로 그들에 대한 차별과 우월심을 갖게 되고, 이는 똑같은 악순환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악순환의 형태는 세계화의 추세가 이루어지는 현재에 있어, 사회의 도태를 끌어올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배제하는 사회에서 포용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

경제·사회적 측면에서 등장한 포용성의 개념이 공간으로 넘어와 포용 도시의 개념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포용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노력보다 경제·사회적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 아니, 우선되어야 한다. 도시와 공간은 그저 시각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것이다. 그간 ‘행복주택사업’이나, ‘햇살둥지 사업’ 등 여러 주택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좋은 사업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의 끝에는 ‘휴거’나, ‘임대아파트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 또한 가슴 아픈 사실이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 대한 체질적인 개선 없이 공간적인 정책에 치중된 것 또한 바뀌어 나아가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임대아파트라고 하여, 과거처럼 질 낮은 주거환경에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목 좋은 지점에 우수한 시설로 짓는 정책이 서울에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고 최막중 교수가 제기한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이 또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끝을 맺으며”

 포용 도시의 핵심 가치는 존 롤스의 ‘공공선’을 지닌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철학 책 속에서 배운 존 롤스의 공공선은 모든 사람이 베일에 서서 자기가 어떤 소득층에/어떤 성별을 가지고/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일 때 지향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처럼, 나 또한 언제든지 장애를 가질 수 있고, 늙을 수 있으며, 성 소수자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들에 대한 차별이 없는 도시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이들을 억지로 물리적으로 섞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분위기를 주도하고, 어떻게 진보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끌 수 있는가에 대한 정책적·사회적·물리적 방안을 복합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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