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시인에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봐 주리라는 기대감.
유능한 비서를 고용한다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나간다. 그러니까 나는 시인의 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처리해 나가는 기업의 회장 같은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내가 무심코 어떤 아름다움을 흘려보내며 생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중요한 것이나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을 시인이 봐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며 한 행씩 내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시인의 시를 읽으면 이내 깨닫게 된다.
고용되고 있는 것은 나구나. 한 문장, 한 단어 무심코 읽어나가다 보면 나는 그의 시선에 포섭되어 가고 몰입하다가 시인의 비서로 고용된 듯 그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마음속에 경건히 받아 적는다.
사랑
사랑도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동안 그녀는 세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내 감정의 피사체일 뿐이지만 사랑하기 시작하면 나는 그녀에게 고용되고, 그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함께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영혼의 개기일식.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개어져, 마침내 내가 사라져 버리는 이클립스.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 사랑의 신비에 감춰져 있다.
글쓰기
글쓰기 세계에도 비슷한 작용이 있다. 아직 읽히지 않은 작가는 익명의 독자에게 어떤 매혹을 일으켜 고용당해야 하는 신세지만, 마침내 독자를 포섭하고 독자가 작가의 시선에 포획되면 그때부터 독자는 작가의 감정과 분위기, 사건의 해석, 그의 언어, 급기야 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에로티시즘적 노예가 된다.
좋은 글은 마땅히 정직하게 오만하다. 자기 안의 진실만큼, 자기의 진정한 매력만큼 비옥하다. 정말 좋은 작가의 중심은 작가 자신 안에 있다. 그렇고 그런 작가는 늘 독자의 시선을 살피고 자기 밖을 떠돌며 헤매곤 하지만.
그런 글들을 읽으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자기가 없어 불안한 작가들은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여행을 떠나든 방구석 어둠 속에서 이를 갈며 울음을 삼키고 있든 문단 씬에는 얼씬 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냉엄한 과정을 피하지 말고 자기가 되어야 한다.
그 정도 강단도 없으면서 글을 쓰겠다고. 숭고한 노동자들처럼 글로 먹고살겠다고. 자기도 사랑받고 싶다고. 비겁하고 비굴한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