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행동과 예술 작품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라.
많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은 잘못이다."
프리드리히 실러, 구스타프 클림트의 < 벌거벗은 진실>에 적힌 어구.
앨리스 사라 오트의 연주는 살아있다는 감각이 들게 한다. 아니. 살아있고 싶게, 살고 싶어지게 한다.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죽은 듯 보낸다. 늘 팽팽한 긴장과 불안이 내 안을 가득 채운다. 죽음의 감각과 무기력은 고래처럼 입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오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사력을 다해 도망친다.
클림트는 프리드리히 실러가 한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겼나 보다. 금장의 배경에 그토록 아름다운 글씨체로 실러의 말을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콘트라베이스의 역할에 대해
신우석의 스토리 텔링 방식은 달콤하다. 갑자기 아끼던 로아커 다크 초콜릿 하나를 뜯어먹게 한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경쾌한 이야기에 검은색 필름 하나를 덧대어 놓은 느낌이다. 아무리 밝아도 슬프다. 화면에 나오는 여자애들은 밝은데 감독의 내면 한구석은 어떤 어두움이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어둠과 빛이 교차되어 보이는 인상은 어딘지 이와이 슌지의 영화와도 닮았다.
그런데 그런 위트가 정말 밝은 것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하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감독은 신우석과는 또 다르게 어두웠다. 빵꾸똥꾸 등 시종일관 명랑하다가 최종회 엔딩에서 어둠으로 다 덮어버려, 명암의 낙차가 더 크고 신선했다.
빛과 어둠의 대비에서.
어둠에 무게중심을 둔. 그러나 끝없이 빛으로 가는.
남자로서의 나의 여유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비로소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오직 암실에서만 총천연색 컬러의 삶의 순간을 현상할 수 있듯, 나는 이렇게 코지하게 스크리닝 된 어둠이 좋다. 어두운 색이 있으면 밝은 색이 더 제대로 드러나곤 하듯, 재즈에서 콘트라베이스가 트럼펫을 지지하듯. 잔혹하고 적나라한 추리 소설이 삶에 힘이 되곤 하듯. 참새가 짹짹거리는 아침에 진한 아메리카노나 블랙티가 어울리는 것처럼.
시의 역할에 대해
그의 연주는, 아니. 그의 작품은 시적이다. 그의 작품은 사라 오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것들을 보면 광고학 수업을 듣던 대학생 때처럼 온몸이 뜨끈해지면서, 금세 그때와 비슷한 질의 식은땀이 땀구멍을 밀고 삐져나온다. 신기하게도 송골송골- 그때와 같은 염질의 땀이 맺히고, 그때와 똑같은 박자의 쿵쾅거림으로 가슴이 뛴다. 내 심장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나 보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정말 놀랍다.
그럴 때면 외과의사가 된 기분이다. 펄떡이고 있는 내 심장을 내가 보는 기분.
경직되고 산문적인 글은 재미없고 진부하다. 그처럼 산문적인 사람은 글보다 더 지루하다.
그의 말이나 행동, 눈빛 같은 것들은 일제히 시의 위로를 필요로 한다. 나를 애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산문의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나는 시에 이끌리는 산문에게 불려 나가곤 한다. 그들은 나의 운문성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시가 되어 오직 시의 품으로 안아 주어야 한다. 나도 강력한 산문이 될 수 있는데.
그때마다 나 자신이 새롭게 시가 되려 애써야 한다. 나도 기본적으로 막대한 산문의 중력을 받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불안하고 불완전한 시다. 산문을 완전히 끌어안고 녹여 하나의 시로 풀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완전한 시는 아니라는 뜻이다. 함께 있는 사람이 시가 아니면 내 안의 산문의 문체를 일일이 고쳐, 내가 힘겨운 시가 되어야 한다. 나도 시의 사람에 기대 위로받고 싶은데.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는 그런 기특한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있다.
그럼 벽 한쪽에 클림트를 걸어놓고
눈으로 신우석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귀로 사라의 음악을 들으면서
입으로 로아커를 먹으면
살아있다는 감각이
되살아 날까.
아니.
아마도 잠깐, 죽음이 마비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