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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Apr 12. 2024

신선함이 중요하다




신선함이 중요하다. 과일이든 채소든 고기든. 글이든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작은 양심 같은 것이다. 야채 장사꾼은 부지런해야 한다. 새벽에 가락동 도매시장에 나가 서울에 갓 올라온 신선한 채소들을 떼 와야 한다. 아침 일찍 갓 떼온 것들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잘 보이게 진열하고, 할머니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 가격을 큼지막하게 써 놓아야 한다.


그런 일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필요하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건조하다. '필요하다'를 이럴 때 쓰는 것은 적절하지도, 성에 차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중요하고(깊은숨을 몰아쉬고 읽어야 한다), 절대적이다. 어떤 일에 헌신한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에는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사랑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다. 헌신을 해야 한다. 게으르면서 좋은 시인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또 게으름은 열정의 다른 표현이지만. 기본적으로 헌신이 없는 사랑도 글쓰기도 매력적인 것이 되기 힘들다.


두말할 것도 없이, 책임과 명분만 남아 자기를 소진시키는 것을 헌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쁜 것이어야 한다. 언제나 어떤 자연스러움 속에서 기쁜 상태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기쁨으로써 헌신해야만, 기쁨의 헌신으로써 사랑해야만, 글을 써야만 한다. 그럴 때 좋은 글이 나온다. 감칠맛 나는 벚꽃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이에 대한 소유욕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랑으로 헌신할 때.


언어의 세계는 그것에 자신을 헌사하고 투신하려는 한 사람의 시인을 기다린다. 드디어 헌신의 시인이 나왔구나- 그 한 사람을, 에메랄드 빛 바다를 건너온 이국의 왕자처럼 반긴다.



그래서 말인데. '맥락 말고 나'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불과 한 십여 분 전의 일이다. 당신은 아주 신선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문 것이다. 그 생각을 따서 가게 앞에 얼른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일종의 정직함이었다. 그 순간, 찰나에 느껴진 글의 매질媒質을 포착해 이렇게 쓰는 것이.


맥락 말고 나-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각종 맥락에 휘둘려, 그러니까 포인트의 마감일이나 온라인 서점의 두세 번째 화면(첫 번째 화면에서는 나도 식상해서 열어보지 않게 되지만 서너 번째 화면쯤 가면 지치고 마음이 급해져 굴복하게 된다)의 책들이나 검색 란에 아직 타이핑하지도 앉았는데 옅은 파란 글자로 표시되어 있는 추천 문구 같은 것을 눌러 따라가다가 읽지도 않을 책을 고르고, 때로는 그것들을 사기 위해 멀리 있는 서점까지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간 서점에서는 또다시 매대 위에 누워있는 책들만을 살펴보다가 또 다른 급한 일이나 약속이 생겨 서점을 나와 버리게 된다. 오직 매대에 있는 것들, 그것들 중에서도 표지가 예쁜 것들을 집어 들고 어떤 감미로움을 매만지다 말고 만다.


사람도 그렇게 만나고는 했다. 우연성과 맥락의 지배를 받으면서. 매대만 만지작거리면서. 만나게 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고 매력을 느끼게 된 사람에게 고백을 하게 되고 고백을 하거나 받은 사람을 만나보게 된다. 만나게 된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는가 하면, 조금도 그렇지 못하다. 나는 그녀의 아주 피상적인 것들만 자기 중심적으로 소비하고 나의 얕은 갈증이나 그녀의 ​얕은 갈증을 적당히 해갈하고 만다. 다, 다 맥락들이다.


나는 없다. 물론 그것들이, 우연히 만나게 된 어떤 사람이나 서점이 밀어내어 집어 들게 된 책이나 적립금의 임박 같은 것들이 나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영혼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식상함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그것의 탈곡은 너무나 강하고 힘이 세다. 나는 고유한 나의 것이 있고, 그러니까 그것은 취향이라고 할 수도, 마음의 모양일 수도, 또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고유한 인격적 모양일 수도 있는데. 그것들이 상당히 마모된다. 맥락에 의해 말이다. 내가 깎고 조각한 것이 아니라, 깎이고 꺾인 것이다.


나는 조각물을 만들고 싶었는데. 나 자신이 조각물이 되었다. 동사 같지도 않은, 피동으로써의 흐물흐물한 수동 동사가.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구경당하는 원숭이가. 달리는 얼룩말이 아니라 관광객을 태우는 조랑말이. 화자가 아니라 청자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물이. 내가 그렇다. 내 모습이 꼭 그와 같다. 개인이 아니라 군중이. 아무런 매력을 발견할 수 없는, 식상한 한 사람이. 똑같이 생긴 수많은 세포들 중에서 핀셋으로 아무것이나 한 개 집어도 되는, 별다를 것 없는 똑같은 매스Mass의 디엔에이가 내 안에 이식되어 간다.


그래서 나는 맥락 말고 나를 찾아야 한다. 내가 오리진인. 내가 만들 수 있는 언어를. 내가 찾아낸 사람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추출한 한잔의 커피를.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불쑥 어떤 욕지기를 느꼈는데,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그것은 샤르트르가 느낀 구토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내가 없어서 느끼는 울렁거림. 실존적 현기증.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샤르트르의 생각을 나의 신앙 안에서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실존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내 앞에는 그것들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이 서로 배타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쩌면 먼저 맥락을 다 지우는 일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성적이고 문화적으로 습득된 신앙이나 책이나 글이나 관계들을 다 짓이겨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빈 곳에 내가 직접 떼오는 산지 직송의 당근과 딸기를 채워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체성을 갖고. 내 취향으로 가득한 것들을 우선 채워 넣어 보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도 남는 것들이 정말 내 것들일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글이 좋아질 것이다. 내 밖의 것들로 가득 찬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맥락은 허전하다. 허물은 징그럽다.


​나비는 홀가분하게 날아가야 한다. 자기를 지켜주고 있던 허물이 땅 아래로 남아, 애잔하게 내려다 보이더라도 눈길도 주지 말고 힘차게 날갯짓해 날아가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충이 벗어놓은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게도 허물은 징그럽다. 나비에게는 그것은 징그러움을 봐야 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징그러움이나 아련함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홀연히 날아가는 것이 나비의 책임일 것이다. 이제 나비는 허물을 벗어 자기의 날개로써만 날개짓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꽃술과 꿀 향을 찾아 힘차게 날아가야 한다.


나는 직접 주체적으로 서점의 곳곳을 뒤지며 나의 언어를 캐야 한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직원은 당연히 신경 쓰지 않는 책들이 꽉 끼여 있는 곳에서 기를 쓰고 보석 같은 한 권을 뽑아 들어야 한다.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책들에 둘러쌓여 그것의 좌우 옆면이 꾹꾹 눌려 숨 막혀하는 책을 펼쳐 들어 파르르 한 번 넘겨, 그의 벨트를 풀어 후- 깊은 숨을 한번 몰아쉬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작가에 대해, 그의 언어들에 대해 탐미해야 한다.


기쁜 헌신을 하지 않는 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헌신할 곳이 없는 생은 어떻게 자기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독특한 내가 없는 생에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하수구에 맥락만 욱여넣어진 듯한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빛날 수 있을까.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나와, 손이 떨릴 때까지, 그렇게 기가 쇠할 때까지 헌신할 수 있는 사랑.  그것 외에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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