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시작하기
글 속으로 뛰어들기에 적절한 곳, 안전한 곳은 없다. 로저 로젠블랫은 글쓰기 수업에서 강의하다 뜬금없이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학생들은 정신 나간 사람을 보듯 그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는 다시 한번 그 노래를 부른 다음, 머릿속에서 "평생 들어온 이 지긋지긋한 축하곡"이 울리는 가운데 글을 시작해 보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가 또 한 번 노래를 부르면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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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발점이 언제나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입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옆문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 애비게일 토머스
- 바버라 애버크롬비의 <작가의 시작> 중에서
Joseph Banowetz가 연주한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를 듣는다. 그제는 한 숨도 안 자고, 점심시간에 한 세미나에 갔다가 늦은 오후에 파하고 스타에서 엎드려서 아홉 시까지 자게 된다(?). 그리고 부랑자처럼 대학로의 붉은 벽돌 계단에 앉아 낮은 벽돌 벽 너머로 물라토 계열 인종 여자의 스페인어 전화 통화 소리를 엿들으며 맥주 두 캔과 과자 한 봉지를 까먹었다. 그리고는 집에 들어와 새벽부터 아침까지 자고 일어나..는 듯했으나 자고, 또 깨고 또 자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해 질 녘까지 자는 기염을 토했다.
무기력과 두려움과 회피의 정점. 인생에서 이보다 더 한 무기력은 또다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유구하게, 손가락으로 터트리면 터지는 커다란 비누방울 풍선 같은 무력감 속에 갇혀 있다가, 독일이 통일된 계기처럼 드디어 우연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려가서 맛없는 편의점 원두로 정성껏 샷을 내렸다.
아아와 함께 오렌지를 설탕에 찍어 먹고 있을 때, 우연히 노래의 날개 위에가 흘러나왔다. Auf Flugeln des Gesanges는 멜로디를 현으로 연주하는 곡을 주로 들었기에, 힘차게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가 너무 새롭게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살아있음'의 감각이 깨어났다. 음악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자꾸 본질을 비껴간다. 스포티파이에서 들려주는 음악들이 살아있는 감각을 일깨워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체되고 꽁꽁 얼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시늉만 한다. 아니 살아있는 체한다. 다 죽었으면서. 다 죽어가면서.
세미나가 끝나고 목사님과도 헤어지고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어느 대학의 현대식 건물에 무심코 들어갔다. 디자인학과의 졸업 전시회 현수막이 보여서 무작정 들어간 것이었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이미 그날의 전시회는 끝난 듯 지하 일이 층에 있는 전시실의 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왜인지 거기서 발걸음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에 다짜고짜 빼꼼히 다른 문들도 열어보고는 획 금방 닫곤 했다.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키보드나 기타 같은 것을 연주하는 연습실의 풍경. 지나가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같은 청춘들의 활기. 오후 시간의 설레는 지하 공간, 삶, 생. 그렇게 지극한 찰나 예술대 공간의 공기를 느끼고는 1층의 스타벅스로 돌아왔다.
내가 아닌 것들. 맛있는 에스프레소 커피. 너무 좋은 음질의 스포티파이 클래식 리스트업들. 넥타이를 매고 점잖은 톤으로 읽어 내려가는 설교 원고나 위트 있는 말들, 다 *본질과 이물감을 일으키는 가증스러운 것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비가 필요하다. 나는 기를 쓰며 아등바등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글쓰기에 관해 말한 애비게일 토머스의 표현처럼 생의 "옆문"으로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정말 살아있단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미끄러져 깊은 암흑의 절망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무수한 비본질의 언저리들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나의 성품대로 고지식하게 정문만을 찾았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마 이런 글 조각조차 끄적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일상적인 생의 감각에 대해서는, 완전히 질식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몰두해야 하는 본질과는 이물감을 일으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