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을 밀어올리는 영양분에 대해서
무심코 순수한 한 동생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의미있는 질문을 받게 된다. ‘저도 든든한 어른이 되고 책임감 있게 살고 싶은데. 그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캄캄하게 느껴져요. 제가 궁금한 게.. 형이 생각하기에는.. 책임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생긴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그 친구는 정말 막막했다.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살 수 있을까,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친구였다. 그 친구를 만나면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입안에 한가득 고였다. 나는 그의 가정 환경이나 성장 과정의 개요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던진 그 질문이 그 순간따라 맑고도 엄중하게 다가왔다. 그 투명한 의문은 나를 향하게 했다.
잠깐, 찰나의 사유를 거친 끝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충분히 사랑받아 본 경험. 사랑 받아 본 사람은 사랑을 할 줄도, 줄 줄도 알텐데. 내가 보기에는 낙낙하고 자작하게 사랑을 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어떤 무거운 책임감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또 하나,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모나고 못되게 행동해서 미운 털이 박힌 사람이 있었다. 한 마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도 꼭 사랑받지 못할 말만 했다. 그런 말과 행동을 온 존재로, 온 사력을 다해 했으니까, 그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도 지치고 지겨워지게 만드는 그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믿음이었고, 반론과 재론의 여지가 없는 확신이었다.
한 전문가가 그를 보며 우리 모두의 생각을 뒤집는 분석을 내놓았다. 저 이는 사랑받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해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사랑받아 본 경험을 갖고 있지 못해서 저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은 내게 확실히 어떤 울림이 있었다.
이제 신학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내 나름대로는 이것들이 다 연관된 이야기라고 느껴져서 뜬금없이 우리 교회의 신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래, 줄 이하의 글을 메모장에 가장 먼저 휘갈겨 쓰고는 추후에 이 부분까지의 내용을 쓰게 되어서 줄 이하의 글이 많이 어색하게 느껴질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무척 종교적이고, 다분히 반공 포스터 문구처럼 느껴질 문체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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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죽은 학문이 아니다. 지금 조국 교회의 신학 현실은 유년 시절 나의 부모 가족과, 동네의 형들과, 부모와 가까웠던 교회 어른들과 함께 했던 정겨운 교회의 그것보다, 그러니까 정치에도 무관심하고, 사회의 어떤 정의에도 무관심할 정도로 하나님에게, 가정에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서로에게만 집중했던, 요컨대 ‘사랑의 신학’보다 한참을 못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아니. 지금 우리 교회의 신학 현실이란 그보다 더욱 가감없이, 참담한 현실이라고 말해야만 하겠다.
교회와 가정에서 신학을 살아있는 것으로, 다시 어떤 원래의 기본대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데, 정말 막막하고 막연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최소한 내가 유년시절에 경험한 교회만치라도(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것이었는지 새삼스레 실감하고 있지만) 어떻게 되살려 놓을 수 있을까.
어떤 찬란한 시절을 다시 꽃피워야 한다. 개인적 비전으로는 우선 사랑의 시절을 꽃피우고 싶고, 더불어 힘겨운 정의의 미래를 꽃피우고 싶다.
물론 사랑과 정의는 떼어서 이야기되어질 수 없고, 그러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일 터다. 그 자체로 분열적인 신학적 사고 방식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둘 중 무엇이 더 기초적인 신학적 경험이냐고 내게 물어오면 나는 아마 잠시 망설이다 ‘사랑의 경험’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이 정의를 내포하고 있지 않기란 어렵다. 정의도 그렇다. 사랑이 빠진 정의는 온전한 것일 수 없다. 하지만 정의를 힘껏 끌어안고 있지 않은 사랑보다 사랑을 배제하고 있는 정의를 추구하는 일이 훨씬 더 쉬운 길인 것처럼 보이고, 정의의 그런 취약점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그것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 것 같다.
때때로 불완전한 정의는 공명심에 가까운 모양을 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짜 정의라고 부르기에는 숭고한 면면이 있다. 좀 더 따듯하게, 불완전한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피상적인 정의나 절름발이 정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것은 온전하지도 못하고,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 심지어 때때로 기괴해 보이기도 한다. 정의가 빠진 사랑이 기괴해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정의는 실상 사랑을 배제한 채, 사랑에 대한 기도나 깊이 있는 사유와 고민조차 결여된 채로 추구되곤 하며, 심지어 그것이 온전한 것인양 이뤄지기도 하는데. 만일 정의가 빠진 사랑과 사랑이 빠진 정의 중에서 무엇이 더 복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가 하면, 나는 후자가 그렇다고 직감작으로 인지하며, 또 그렇게 믿고 있는 편이다. 개인사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역시 개인적인 하나님 이해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지적이고 의지적인 올곧음이 쏙 빠진 사랑도 이상하고 불협하다고 느껴지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열정도 없는 정치인이나 목사가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의 현실을 향해서 바삭한 낙엽처럼 메마른 정의만 부르짖는 현상이 조금 더 괴상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사랑과 정의. 정서적 온전함과 논리적 올바름. 운문과 산문. 그것들을 함께 온전히 이룰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만일 복음과 조금 더 가까운 어느 하나를 먼저 추구해야만 한다면, 또는 더 기초적인 하나님 나라의 경험을 먼저 해야 하는, 지적이거나 관계적이거나 사회적인 한계의 상황에 있다면 사랑의 문제를 먼저 꼭 붙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사랑을 마당의 개처럼 묶어놓고, 이따금 목줄을 풀러, 비록 더디게라도 한 걸음씩 정의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가정과 교회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지혜로운 하나의 길이거나, 누군가에게는 최선일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어떤 보편적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에는 기초와 기본,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사랑의 영양분을 족히 머금은 사람은, 자기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정의의 새싹을 싹트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의 새싹은 언젠가 울창한 정의의 숲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