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깊이를 알아보려 할 때 내가 가진 나름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속도’를 보는 것이다. 속도와 깊이는 반비례한다.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부하고 분별하는 속도가 빠르다면. 적어도 내 기준에서 그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특히 사람에 대한 판단이 빠른 사람이라면 깊이를 가늠하기가 더욱 쉽다. 사람을 속단하는 사람은 그 속도만큼 깊이도 얕다. 개인적 통계에 의하면 예외는 거의 드물었다.
청년 시기에 나는 자신이 머리만큼은 무척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논리적 대화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무척 오만한 대화의 태도를 가졌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누군가 나에게 가파른 판단의 말을 걸어오면 그 즉시 논리적으로 설복시키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동시에 나의 행동은 종종 너무 당차고 특이해 보이곤 해서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공동체에서 그 독특함이 두드러질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목사님, 설마 제가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저도 복음 전하고 싶은 똑같은 열정으로 이렇게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 붙들고 애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보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는 것만 복음 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저희 중심적 생각일 수 있어요, 목사님. 붙어있는 사탕만 드시고 주보는 쓰레기통에 버리세요-라고 말하는 게 더 복음을 잘 전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 하나만 물어보자. 아무개야 네가 나를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을 때는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상대의 숨이 턱 막힐 법한, 그런 말을 내뱉는 일을 감행하기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모습도 거의 다 옛날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그런 상황이 오면 위트로 넘겨버리거나 능청스럽게 클린치 기술을 쓰곤 한다. 그것은 이미 자웅을 겨루는 상황에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냈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깊어지면서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나 어떤 전문 분야의 동료로서 누군가를 재빠르게 판단하고 수납하는 일이란, 실은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고 더 전문성이 있거나 깊이 있는 타인이 자신을 수납하게 하는 일이다.
행동이 민첩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속도가 빠른 것은 부지런함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 활동에 관한 한 정반대로 속도와 성실함이 반비례할 확률이 높다. 판단의 속도가 빠를수록 지적 게으름과 정비례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상’이다. 당연하게도 현상은 내용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내용이 떨어트리는 각질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내용은 현상의 해석, 또는 원인이다. 그것이 현상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 것일지는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이해는 일이든 사람이든 무척 사적인 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다.
상윤: 제연아, 회의 중에 왜 하품을 하고 그래? 졸려? — 지민: 저 사람, 지금 너무 재미 없는 거야. 공연히 빈 하품이라도 하면서 나름대로 재미와 희망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야. — 제연: 고개를 돌려 지민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 상윤: …
현상에 대한 해석은 ‘사적’이고 ‘진정’할 때에라야 진실에 바싹 다가갈 수 있다.
현상은 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보일 뿐이다. 그것은 사유의 의한 정보가 아니다. 그럼에도 행동, 말, 선택, 순간적으로 보이는 태도 등은 성질이 급하거나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에 의해 가파르게 어떤 얄팍한 근거로 전락한다. 판단하고 분류하고 수납하는 일에 사용된다. 그러면서 그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를 더 튼튼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현상의 원인과 본질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직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정보인지 알 수 없다.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본격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사유나 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사유하지 않고, 진지한 대화를 하지 않고 단편적 현상만을 단서로 해서 결론짓기 때문에 우리의 해석은 어떤 일이나 어떤 존재의 본질과 한참 거리가 먼 곳에 당도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너무 자주 범하고, 그로 인해 관계가 끊기고 어떤 일을 함께 하는 동료의 길에서 각자의 길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니까 사유와 대화의 능력은 일 그 자체의 능력이기도 하다.
한편 사유하는 일이나 대화하는 일은 다 무척 힘든 일이다.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해야 한다는 점에서 둘 다 하고 싶지 않은 일, 그러니까 투쟁하는 일이다. 로쿠잔 미술관의 입구에는 ‘Struggle is beauty(고투는 미).’라는 오기와라 로쿠잔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난생처음 아내가 산파하는 장면을 보며 남편이 눈물을 흘리는 풍경, 훈련소에서 까까머리를 하고 조교의 구령에 따라 ‘앞으로 가!’는 막내 아들을 보며 가족이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투쟁이 왜 아름다운 것인지, 막연하게나마 더듬어 가볼 수 있게 해준다. 대화도 사유도 힘든 투쟁의 길이지만, 그것을 잘 해나가기만 한다면 자신을 성장시키고 공동체나 어떤 사적인 사이를 한 단계 높은 신뢰의 관계로 올려 놓을 수 있다.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고 지적으로 성실하지도 않은 바리스타가 내미는 커피 맛은 정말 형편없다. 커피를 사랑하지만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성미가 급한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의 맛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커피에 대한 자신만의 깊은 사유도 동종 업계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도 거의 해보지 않은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기는 해서 거듭 피상적 노력만 했을 뿐 어떤 투쟁의 지경까지는 닿아보지 않은 것이다.
‘완벽한 한 잔의 에스프레소{일리 커피의 모토)’를 맛보려면, 그것을 내려주는 존재가 커피에 대한 사적인 진정함(열정, 사랑)과 지적 성실함(깊이감)을 가진 바리스타여야 한다. 바리스타의 세계가 이럴 지경인데 축구 선수라고, 바둑 기사라고, 신학자라고, 목사라고 다를 턱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