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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 2

by jungsin
이 지루한 일상의 엑시트가 될 지, 그녀와의 관계의 엑시트가 될 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사랑하고 싶은 욕망은 개방하고 싶은 욕망이다. 꼴도 보기 싫은 사람에게는 변기에 자기 소변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주고 싶지 않은 법이다. 낯설고 외로운 곳에서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도 꼭 걸어잠궜는지 또 확인하고, 남방 단추를 맨 위까지 꼭꼭 채우고, 바지의 지퍼가 끝까지 올라가 있는데도 또 올리고 또 올리던 현종이었다.

그는 시시콜콜한 생의 비밀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현종아. 그의 이름을 부르고 가만히 있어 왜 부르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답할 사람.
오직 비밀을 얘기하고 싶어 약속을 잡고 만날 사람.
늦은 새벽까지 이십사 시간 카페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다 심야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동안 창가에 기대 싱거운 미소를 머금고 잠들게 할 사람.
다른 일로 피곤한 채 만나 졸면 실례가 될 것 같아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노곤해지며 스르르 눈이 감기고 철에 이끌리는 자석처럼 고개가 그에게로 굽어지는 사람.
고서들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소박하게 꽂혀 있는 책장 같기도 하고, 삐그덕거리는 나무 계단 같기도 한 사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첨예하고 뾰족하게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개의 꼬수운 발바닥 냄새 같은 사람.
가장 완벽히 ‘그냥’의 나로서 대하고 싶은 사람.
그럴 수 있다거나 그래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할 것 같고 꼭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사람.
남은 생에서 나에게 남아있는 모든 그냥이란 단어를 전부 다 쏟아버리고 싶은 사람.
그의 허기짐은 그런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현종은 오늘 가게 문을 조금 일찍 닫았다. 가게는 아주 작은 카페로, 몇 달 전 고택이 밀집한 서울의 한 주택가에 마련했다. 고작 일곱 평 남짓. 그는 그곳에 국민학교 시절에 앉던 고동색 책상이 떠오르는 작은 나무 테이블 세 개에 의자 여섯 개를 놓았다.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에 불과할 만큼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에 있는 가게였다. 삼 년이나 아무에게도 팔려 나가지 않은 채로 바닥에는 먼지가 덩어리를 이루며 굴러다니던 공실이었다. 그곳에서 생애 첫 장사를 시작하겠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 거의 모두가 현종을 말렸다. 오직 가게 주인집 할머니만 좋아하셨다.


그가 그곳을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우선 그 공간은 드르륵 옆으로 미는 문을 갖고 있었다. 그 문이 현종의 어릴적 감성을 자극했다.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던 희망문구의 문이 그랬다. 옆으로 드르륵 열리는 은빛 샷시 문. 그 문이 희망 문방구의 문을 꼭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두번째 이유는 스무 걸음만 걸어가면 있는 커다란 나무 때문이었다. 장정 두 사람이 팔을 길게 벌리고 끌어안아도 서로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큰 나무였다.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적어도 서너 세대는 전부터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있었을 거라고. 나무 아래에, 동네 할머니들이 봄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마음을 뉘어놓고 쉰다고. 뉘어놓고 쉰다니. 그것은 다 쉰 할머니의 뉘인 쉼일까. 할아버지의 그런 표현마저 너무 사랑스러웠다.


장사가 아니라 아지트야. 남들에게는 파일럿 버전이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지만 그는 몇 달 전부터 하루종일 그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새벽 다섯 시쯤 가게에 도착하면, 꼬박 두 시간 정도는 공간과 기기의 청소를 하는 데 몰두한다. 오전에는 아직 한 시간에 한두 명이 찾아올 뿐인 손님을 정성껏 응대하는 틈틈이 가게뿐 아니라 동네와 어울리는 작은 화분 식물이나 그림을 찾아보기도 하고, 세팅이 채 완성되지 않은 커피의 미세한 부분을 연구하기도 한다. 단지 예뻐서 덜컥 사서 들여놓은 중고 머신에도 잘 맞고 손님들의 입맛에도 알맞을 원두 블렌딩과 굵기, 추출법을 연구하고 가늠하는 일 같은 것이다. 오늘도 오후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커피 공부를 했다. 오후 손님은 없었고, 가게 앞을 기웃거리시는 동네 어르신 세 분께 서비스로 아이스 미숫가루 라떼를 내려드리고 가게를 나서는 길이었다.



’잘 지내세요?‘란 의례적인 물음에 처음부터 말문이 막혔다.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라고 치다가 지우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치다가 지웠다. 어색할 정도로 오래 답을 하지 못해 등골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다 얼른 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글자나 눌러댔다.


네. 그런대로 꾸역꾸역 삼시두끼 밥도 먹고.. 생존에도 성공하며 그럭저럭 지냈어요. 너무 오랜만이죠. 혹시.. 지금 한국 아니신가요? 역시 불필요하게 무겁고 질리는 말들이었다. / 올해 초부터 한국에 들어와 있어요.


현종은 소개팅을 하고 몇 해가 지나 희승이 외국계의 큰 패션 회사에 들어갔단 소식을 들었다. 다시 몇 해 뒤에는 아예 동유럽 어느 나라에 나가 일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 벨루..가..랑 비슷한 이름의 나라에 나가서 사신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 벨라루스요. / ㅎㅎ ^^; 아 네.. 좋았나요, 벨라루스?


그렇게 거짓말처럼 시작된 채팅이 거의 삼십 분간 이어졌다. 현종은 그녀가 아직 혼자인 것 같다고 확신했다. 탈출구가 필요할 때마다 한번씩 열어보던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다. 한 장씩 한 장씩 그녀의 사진들을 넘겨보다 보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세련된 옷차림에 썬글라스를 끼고 호텔 로비 같은 곳에 있거나, 해변에서 음료를 마시는 옆모습 같은 비현실적인 사진들이었는데, 다 혼자였다.


저희.. 언제 얼굴 볼래요? 현종이 엔터를 눌렀다. 그녀가 한참 아무말 없이 멈춰 있었다. 이 지루한 일상의 엑시트가 될 지, 그녀와의 관계의 엑시트가 될 지 모르는 순간이었다. ‘입력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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