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1. 감정의 노화
늙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게 노화당해도 되는 걸까.
노화에 대한 그 카드 뉴스를 본 뒤로 멍하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실은 요동한다고 말해야 겠다.
그 카드 뉴스에서 한 가정의학과 의사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노화의 징후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입가 주름일까. 시력일까. 치아일까. 무릎일까. 카드를 넘기며 보게 된 답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인간의 노화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곳은 감정이라고.
살아서 격동하는 감정을 느끼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면 늙어가는 거라고. 생각해 보라고. 어렸을 때는 얌체공처럼 통통 튀는, 살아 움직이는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냐고. 열한 살 때, 열일곱에, 스물에 감정의 생동감이 어땠느냐고. 생생한 감정을 느끼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면 곧 늙을지도 모른다고.
감동적인 영화를 봐도 예전처럼 많이 울지 않게 되고, 이성을 보고 설레는 일도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도 줄어들고, 제일 먼저 감정이 무뎌지고 마비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늙는다고. 나이가 들어도 살아있는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잘 늙지 않는다고.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아니 정말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떠도 새로 주어진 하루가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뜨고 한참이 지나도 죽은듯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스릴 있고 무서운 시리즈를 봐도, 다음 회차. 다음 회차. 그냥 멍하니 정주행을 했을 뿐. 그건 살아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이런 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격하게 슬퍼하고, 몸서리 치며 무서워 하고, 천국처럼 재밌어 하며 한 편 한 편 아껴 보았다. 스무살 때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기대되었다. 짤막하게나마 거의 매일 다이어리를 쓰려고 애쓰던 시절. 술에 취해 들어와도 mook 철제 다이어리를 펼쳐 몇 글자라도 적고 잠들던 시절. 오늘은 체육대회를 했다. 축구를 하는데 내가 높이 점프해서 헤딩을 할 때 여자애들이 소리를 질렀다. 친구들과 웃으며 땀흘리며 동동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다녀왔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재밌다.
그랬던 내가, 이제 친구를 만나도 여행을 가도 무엇을 해도 한 침대 광고의 카피처럼 흔들림 없이 점잖기만 했다.
늙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게 노화당해도 되는 걸까.
그 글이 내 안에서 어떤 소요를 일으켰는지. 오래전에 알던 이성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십 년을 훌쩍 넘었다. 소개팅을 하고 몇 번 만나다 스스로 연락을 끊은 사람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자꾸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이니, 남들처럼 하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4학년 때 전학간 여자애가 보고 싶어 친구랑 둘이 그 애의 15층 아파트에 찾아갔다가 차마 벨은 누르지 못하고 돌아나오는데. 그 애가 뒤따라 나왔다. 그렇게 그만, 셋이 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나긴 15층을 내려오던 아찔한 기억.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웃음과 설렘을 참지 못하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친구랑 뛰어 도망쳐 나왔다. 뛰어나오는 내내 웃었다. 그 순간의 우리는 열심히 묶다 손에서 놓친 긴 풍선 같았다.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흥분의 도가니 상태로 그 아파트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그 애가 15층 베란다에 나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두 손을 입에 모아, 현종아! 외치더니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보였다. 안녀엉! 너무나 부끄러웠지만 우리도 그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청춘의 한 단락이 매듭지어졌었다.
수용받았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요청에 의한 소개팅이었다. 애초에 상대의 지목으로 하게 된. 애프터도 먼저 걸어오고, 신촌에서 이태리 식당과 카페도 가고. 그렇게 몇 번 다분히 수동적으로 대했다. 애써봐도 떨림이 생기지 않아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 분에게 이른 아침 댓바람에 메시지를 보냈다. 자니에 버금가는 일어났니.
에 버금가는 잘 지내니, 아무개 교회 지금도 다니니. 볼 것 없던 시절의 나였다. 그런 내가 있는 그대로, 나의 가능성이 온전히 인정받았던 따뜻한 느낌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날들의 내가 궁금했다. 난 너무 오래 나를 잊어버린 듯, 잃어버린 듯 살았다. 나를 찾기 위해, 나의 푸르름을 마음에 담고 있던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한번 다시 마주 앉아 그 사람의 망채에 반영되는 나를 느껴보고 싶었다. 눈을 마주치면서 내가 잃어버리고 그녀가 보전하고 있는 것을 마주해 보고 싶었다. 또 행여라도 지금도 그녀가 나에게서 찾고 싶은 것이 남아있다면, 그런 것들은 무엇일지 한번만 느껴보고 싶단 충동이 일었다.
또한 그녀가 궁금했다. 한심하게도 몇 번씩이나 만나고도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나는 무척 보수적이었다. 세속의 여자에게 수녀님에 가까운 신앙과 청순함을 기대했다. 세번째 쯤 본 어느날은 복잡한 명동의, 집중하기도 어려운 작은 카페에서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성경 묵상 나눔을 하자고 했고. 그녀는 순순이 따라주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다.
액세서리나 화장, 눈빛의 느낌 같은 것도 어딘지 마음에 걸렸다. 결정적으로 시내 데이트 후 예배 전 교회 커뮤니티 모임에 함께 들어가게 될 때 그녀가 오늘 만났던 걸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던 내가 그걸 안 좋게 보았다. 참 걸리는 것도 많았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윤리적인 판단을 했다. 사람을 볼 줄 몰랐던 시절. 오직 얼마나, 어떻게 예뻐 보이는가. 이 금은 14k인가 24k인가. 이성 감정평가사라도 되는양 자기중심적 태도로 여자를 대했다. 신앙과 윤리적 분별의 시도로 점철된 시간만 보냈다. 미련하고 아까운 청춘이었다.
(계속)
2. EXIT.
EXIT와 EXIST는 같은 말이었다.
일단 천연덕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십 년 가까운 세월만에 연락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네요. 아쉬움 없을 때는 연락하지 않고, 그렇게 다시 안 볼 것처럼 오랜 세월을 흘려 보내다 이렇게 불쑥 연락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혹시 불쾌하신 건 아니죠? 실은 이따금 생각이 나더라고요. 용기만 생긴다면 언젠가 한 번은 꼭 연락해 보고 싶었는데. 망설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세월이 참 무상하죠. 그때는 제가 너무 덜 여물었었어요. 설렘만 느끼고 싶어 했지 사람의 깊이를 볼 줄 몰랐어요. 승희 씨는 잔향이 오래 남더라구요. 늦은 밤쯤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한 머스크 향 같은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왜 그런지 며칠이 지나도 은은하게 남는 자스민 향 같았어요. 문득문득 생각날 때면 조용히 뒤척이기만 하다 이제야 쪽지 보내요.
식의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돼. 절대로, 절대로 안돼. 현종아 잘 들어. 나는 그녀를 지난 주쯤 봤어. 우린 가볍게 커피에 추러스를 먹으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했고. 겨우 한 주만에 안부를 묻듯 으레 하는 연락을 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스무 배쯤 가벼운 분위기로 말을 걸어야 돼. 너의 모든 진지함을 스댕 대야에 붓고 락스를 한 바가지 넣고 삶는 거야. 너는 표백됐어. 너는 가벼워. 너는 긴장하지 않아.
손가락 끝에서 ‘요즘도 교회 잘 다니세요?’란 알량한 인사말이 타이핑 되어 나왔다. 그렇게 쓰고 엔터를 눌러버렸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지금 뭘하고 있는 걸까. 더할 나위 없이 실없고 어리석은 인사말이었지만 나의 실없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엔터를 누르고 싶었다. EXIT를 누르고 싶었다. 어린 시절 한동안 입고 다니던. 어디서 난 티였는지 모를 흰 티에 쓰여 있던, 그 까만색 영어 단어처럼 말이다. 그때는 [엑시트]인지 [이그지스트]인지 늘 헷갈려 했었는데. 맞아. 그 티에 쓰여 있던 단어, 엑시트였어. 엑시트.
이제와 새삼 돌아보니 엑시트든 이그지스트든, 어차피 상관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 EXIT(탈출하다)와 EXIST(있다; 존재하다)는 같은 말이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엔터를, 엑시트를 누르고 싶어 했다. ‘요즘도 교회 잘 다니세요?’ 엔터와 ‘가나다라마바사’ 엔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조금도 변함 없고, 생동감도, 일렁임도, 아무 재미도 없는. 끝없이 계속되는 긴 단락을 전환할 엔터를 누르고 싶었다.
며칠이 흘렀다. ‘6일 전 보냄.’ 외마디 파란 말풍선 아래 회색 작은 글씨가 그것이 며칠 전의 것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가나다라마바사 메시지는 외롭게 덩그러니 홀로 있었다. 말풍선을 오래 누르고 있으면 나오는 ‘전송 취소’란 기능이 유혹했다. sns 전혀 안 하는구나.
그렇게 한 주가 더 지났다. 13일 전 보냄. 또 한 주, 또 한 주.
두 달 전 보냄. 세 달 전 보냄. 이제 더는 메신저 앱을 열어보지 않았다. 스마트폰 용량이 부족해서 배달 앱이 업그레이드 되지 않던 어느날, 메신저 앱을 가장 먼저 지웠다. 긴 시간이 흘렀다.
여섯 달쯤 만에 sns에 들어갔다. 웹 브라우저로 보이는 sns 알림에는 인도 목사님들이 보낸 무수히 많은 메시지 알림이 빨간 숫자로 써 있었다. +99. 교회 건축 사진과 함께, 하이. 헬로우. 꾸준하고 성실하게 메시지를 보내오던 몇 분들에게, 나는 잊지 않고 짤막하게나마 답장을 보내왔다. 그중에 한 분과는 몇 번 영상 통화를 하기도 했다. 아무의 희망도 짓밟고 싶지 않았다.
메신저 앱을 다시 설치했다. 목사님들께 한 분씩 답장을 해드리다 아래쪽에 희승 씨 프로필 사진이 보이는 메시지 창이 보였다. 아! 전송 취소 눌러야 되는데. 얼른 창을 열었다.
‘읽음’
‘메시지 입력 중…’
그녀가 답장을 쓰고 있었다. 곧 말풍선이 올라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세요?’
귓속까지 들릴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순간의 쿵쾅임이 십 년도 더 된 것이었다는 걸 그때는 세지 못했다. 나는 그동안 작은 가게를 열었고, 글을 썼다.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정신없이 보내던 날들이었다. 우울증과 싸우며 집안의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고, 오래 미뤄둔 대학원 논문 주제의 갈피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