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아있다는 것 3

by jungsin
그런 일체의 감각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입력중…’을 바라보는 순간, 현종의 쿵쾅임이 이상하게 고요해졌다.


언제요? ㅎㅎ


심장이 다시 요동하기 시작했다. 음…. 모레 월요일에 저녁 시간 어떠세요? 너무 급한 속도였다. 모든 일에 느린 현종이 이성과의 무언가를 결정지을 때는 이렇게 급하곤 했는데. 잘돼 가던 일도 성급해서 그르치곤 했는데. 십 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책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녀의 채팅이 다시 멈췄다. 이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여유가 없으면 저는 몇 주 있다 뵈도 괜찮아요. 마침 제가 요즘에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라.. 아, 혹시 부담되시면 안 만나도 괜찮아요. 이렇게 연락한 것만으로도…


아니에요. 편하게 한번 뵈요. 편하게, 편하게.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부사였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급히 출근하느라 우산을 빠트렸다.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작은 개인 빵집의 아담한 캐노피에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띵.‘ 그녀의 프로필 이미지 풍선이 올라왔다. 저는 출발 했어요. 그런데 차가 좀 막히네요. / 아,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저도 급히 비를 좀 피하느라 아직 지하철도 못 탔거든요.


여름비는 잦아질 기세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장대비의 줄기를 바라봤다. 한여름이지만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기다리다가는 캐노피 모서리의 거미줄에 붙들린 날벌레처럼 우울하고 무력한 기분에 잠길 것 같았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한동안 내달려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어갔다.






신촌역에 도착해서도 아직 비가 많이 내렸다. 먼저 신촌에서 보자고 한 것은 현종이었다. 그녀는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뇌리에서는 그녀를 이 거리에서 보았던 기억이 잘 잊히지 않았다. 그날들의 기분이 자신 안에서 그대로 재현될지, 과거가 어떤 이미지로 상영될지 느껴보고 싶었다. 세월이 이토록 많이 흐르고 신촌에서 보면 어떤 느낌일지. 딸각딸각, 어느 손에 포크와 칼이 들려야 하는지도 헷갈려 할 만큼 부자연스러운 손짓으로 그것들을 들고 뚝딱거리던 이태리 레스토랑에서의 자신의 서툼은 그대로일지. 그녀는 여전히 신촌과 잘 어울릴지.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거리의 고유한 흥분감은 그대로일지. 그런 일체의 감각들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프랜차이즈 화장품 가게에 들러 올리브색의 긴 장우산을 집어 들고, 찰박찰박 비 오는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십 분쯤 걸어 카페에 도착했다. 중심가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갈래길에 있는 곳으로, 적당히 큰 카페였다. 낮은 음량으로 재즈가 흘렀고, 주 손님층인 서른 안팎 여자들의 말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음처럼 들려왔다. 카페 안은 푹신한 소파 석부터 포근해 보이는 안쪽 자리까지 거의 모든 테이블이 다 차 있었다. 왼쪽 끝에 조금 추울 법한 창가 자리 하나가 빈 것 같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마저 자그마한 숄더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향을 바꿔 돌아서 걸어 나가려는데, 마침 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부딪힐 뻔하며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다섯 걸음 정도를 걸어가다 생각해 보니 눈빛이 어딘지 낯익었다. 다섯 걸음쯤 더 걷다 힐끗 돌아보았다. 마침 그 여자도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찰나 현종은 얼어붙었다. 아마, 그녀 같았다. 그녀가 정말 맞다면 상상한 것보다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혹시… 희승 씨…

아, 네. 맞아요.


그렇게 말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현종의 마음에 남아있던 모습은 이렇게까지 여성스럽지 않았는데. 서른을 갓 넘었을 때의 보이시하고 시크했던 모습이 많이 가신 것 같았다. 예상한 것보다 긴장이 많이 되었다. 가다듬어 놓았던 마음가짐과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던 생각들. 많은 것이 이미 흐트러져 버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마주하자 불쑥 두려웠다. 다가가 자리에 앉기도 힘들어 우선 커피를 주문하고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돌아서 나왔다.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웃었는지. 두려워 했는지. 설레 했는지. 그 모든 게 섞인 표정이었는지.


아메리카노 한 잔 연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맨 정신으로 또렷이 집중하려면 연한 커피를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쯤에야 십여 년 전에 매번 그랬듯 오늘도 그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커피를 받으러 오는 것이 매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할 생각을 하니, 자리에 다가갈 수 없었다. 커피까지 받아갈 핑계로 자리에서 피해 있으면서 호흡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커피는 금방 나왔다. 이제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꼼짝없이 커피를 들고 그녀 앞으로 가야만 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호흡은 가쁘고 이성과 감정은 더 어지럽게 흐트러트려졌다.


집중을 하지 못해 머그를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다 커피가 튀었다. 커피를 닦는 냅킨에 시선을 둔 채 물어보았다. 잘 지내셨어요?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살아있다는 것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