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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면 Oct 06. 2022

무사히 닿기를


증명서를 발급받으러 행정 복지 센터에 가던 도중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길을 물으셨다.

“○○초등학교가 어딘가요?”

초행길이신 듯 한 손엔 주소가 적힌 메모를 들고 계셨다.

○○초등학교.

매일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출근할 때 꼭 거치는 정류장 중 한 곳이었지만 놀랍게도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애써 기억을 떠올리고 있으니 할머니는 다른 곳을 물으셨다.

“저기 보이는 게 ○○아파트인가요?”

그것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엔 어려운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워낙 많았다.

결국 네이버 맵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핸드폰을 들고 검색하고 있으니 할머니께선 굉장한 실례를 범한다는 듯 미안해하셨다.

“아이고, 바쁘실 텐데 어째.”

아니요, 하나도 바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대신 그냥 웃었다.

(실제로 여유로운 날이었다.)

○○초등학교는 할머니와 내가 있는 곳에서 도보로 16분 거리에 있었다.

영 시원찮은 안내에도 할머니는 여러 번 고맙다며 환하게 웃어 주시고 떠나셨다.

잘 찾아가셨을까? 조금이라도 같이 가 드릴걸.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도움이 되고 싶다.

그만큼의 호의를 선물 받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중 처음으로 친구와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3박 4일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해외여행이 둘 다 처음이라 공항이나 선착장에 출발 시간보다 두세 시간은 빨리 가야 한단 걸 몰랐다.

출발 시간이 겨우 한 시간쯤 남았을까.

호텔에서 여유롭게 출발한 우리는 당연하게도 배를 놓치고 말았다.

친구와 내겐 새 티켓을 살 돈이 없었다.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낮에 도착했던 선착장에서 나라 잃은 표정으로 머물다가 영업시간이 끝난 밤이 되어서야 건물 밖으로 나와 한편에 쭈그려 앉았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지만 집에 갈 수 없을 거라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때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다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뭐라고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느냐는 물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든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휘몰아쳤다.


일본어를 잘하는 친구는 재빨리 우리 상황을 설명했다.

우린 한국인이고, 돌아갈 배를 놓쳤는데 티켓을 살 돈이 없다고.

운전자인 아저씨는 이야기를 듣고는 선뜻, 정말 기적처럼 도와주겠다고 했다.

여자애 둘이 노숙은 위험하니 근처 호텔에도 데려다주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 아저씨를 어떻게 믿고 덥석 차를 얻어탔는지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티켓값을 꼭 송금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사히 도착한 호텔에서 아저씨는 연락처가 적힌 명함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우리는 호텔방에서 깨끗하게 씻고, 단 몇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로운 티켓을 끊고 배를 기다리면서 친구가 말했다.

“나 이제부터 길을 잃거나 우리랑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 보면 꼭 도와줄 거야.

우리 집에서 재워 줄 거야.”

아, 정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서유럽과 동유럽을 여행할 때 수십 번 길을 헤맸지만 두렵지 않았다.

물론 구글 맵도 유용했지만 정말 큰 도움이 된 건 결국 사람들이었다.

희한하게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또 받았다.

호의라는 건 그만큼이나 강한 힘인 것 같다.


언젠가 명동에 놀러 갔을 때 아랫지방에서 온 듯한 또래 무리가 길을 물었다.

드물게도 아는 곳이어서 나도 모르게 열렬히 길을 설명하고 있으니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랬다.

“왜 이렇게 친절하세요?”

그냥 대강 알려 주거나 모른다며 제 갈 길 갈 줄 알았던 걸까.

사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 속에 숙소를, 관광지를, 식당을, 집을 찾을 수 있었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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