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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란 누구를 위함인가

주말 저녁에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르는 소회

by 너구리

두어 달 전의 일이다. 대학교 친구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주말에 제주에 내려오니 점심이나 먹잔다. 이제 막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륙해 번지기 시작했으나 그 파장에 대해 크게 생각 못했던 순간. 사회에 미칠 영향을 판단하기 전이니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맞이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주말 시간 그것도 일요일 오후에 식사 약속을 잡았다. 서울의 방문객과 주말 시간에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나로서는 나름 희생이 담보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일주일 내내 업무에 시달린 후 토요일 오후가 되면 육지를 가거나 하지 않는 한 무조건 걷기 위해 외출을 한다. 오전을 오롯이 혼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날그날의 목적지는 당일 아침에 정하고는 정처 없이 보낸다. 그러다 집에 오면 오후 시간이 지나고 다른 약속이라도 하나 생기게 되면 남은 시간은 일요일 하루. 그것도 직장과 상관없이 다른 일을 하겠노라 만들어놓은 단체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란 극히 적다. 그 시간을 내놓으라고 연락이 왔으니 어찌할까 고민이 되기도 한다.

이 친구는 종종 제주에 내려온다. 학교 때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지만 선후배에게 들러붙는 재주는 남달라서 크게 홀대를 하지 않는 한 참으로 사람에게 잘 '엉긴다.' 다르게 말하면 붙임성이 좋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나이 50대 후반에 달하면 사회적으로 일가를 이루거나 가정적으로도 무언가를 해놓았을 테지만 별로 그 평가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친구다. 나름 누군가에게나 사정이 있지만 그 역시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안타까운 역사 덕분에 결과에 따른 사정이 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공안당국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정신이 깨져 버렸다. 군대를 마치고 고문의 후유증이 심해 정신적으로 고생하고 개신교에 귀의해 지금은 꽤나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친구다. 그 사정을 잘 모르던 시절. 다른 친구들이 그 친구를 달래거나 반강제적으로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치료를 받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거니와 개인적인 고문의 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안타까움과 함께 나와 상관없는 무관심으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름 최선을 다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학교 친구들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지게 하는 연락책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멀어지기 쉬운 예전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몸이 아파 수술을 하거나 직장에서 비실비실 앓고 있을 때도 잘 지내냐는 투박한 말투로 안부를 물어오곤 했으며 다른 친구들에게도 내 근황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불현듯 내려와서는 멋쩍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 중간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자신과 같이 80년대와 90년대 초까지 강제징집 녹화공작의 피해를 받았던 친구들과 함께 각자의 경험을 토로하는 인터뷰를 하게 됐단다.

그가 들려준 인터뷰 내용을 듣자니 가슴이 저민다. 집에 돌아와 다른 누군가 적어놓은 내용을 보니 다시 한번 가슴이 짠하다. 그 친구는 서빙고로 처음 끌려가서 버티던 자신의 심정과 이후 자신의 상황을 몇 줄 안되지만 격하면서도 너무나 가슴 아프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굴복하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고 버텼습니다. 나를 담당하던 놈이 그러더군요. 일주일 후에도 그 눈깔이 동태 눈깔이 안되는지 보자!"

그는 이어 " 그의 말대로 내 눈은 일주일 후에 동태 눈깔이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은 몇 놈이 죽어라고 패더군요. 나중엔 패는 건 애무 수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시로 바뀌었는데 군복 입은 놈도 있었고 사복 입은 놈도 있었습니다. 양손에 전기를 연결하고 한 놈이 건너편에 앉아 무심하게 스위치를 눌러요. 나는 전기에 튀겨지고 욕조에 머리 처박는 건 양반이에요. 판때기에 묶인 채 수건 덮고 고춧가루 물 붓고, 수시로 통닭처럼 달아매고 결국에 정신줄을 놓아버렸지요. 힘들어서 자살시도도 몇 번 했고요.

결국에는 기독교에 귀의하고 나를 고문했던 자들과 고문하라고 시킨 자들, 그들을 용서하게 해달라고 목술 걸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살아야 돼서,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들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 친구는 최근에야 4.3에 대해 이런 저련 이야기를 듣게 됐고 4월에 다시 내려오겠다고 올라갔다. 자신의 고통의 수준이 4.3에 비할바가 안될 것 같다며. 물론 코로나 19가 우리 사회를 집어삼켰고 결국 제주에 내려오지는 못했다.

이주민인 나는 4.3이 너무 아파 직시하기에 어렵다고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약해서인지 몇 년째 추념식을 다니고 장소도 찾아보고 하지만 그 아픔의 강도는 도대체 가라앉질 않아 괜히 당사자들 앞에서 아픈 척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 친구와 일요일 낮 식사와 차 한잔의 온기를 나누며 여전히 나의 건강을 걱정해주던 모습이 괜히 이상했다. 사람이 어려울 때 위로를 해주었어야 하는데 나는 내 아픈 것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괴롭고 살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누구를 용서하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최소한 개인이 용서를 하면 그 뒷일은 역사가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 역사는 해결을 해 주려나. 해결하는 중인가.


코로나가 한창인 지난달 병원에 다녀와야 해서 김포공항에 내려 걷는데 그 친구가 전화를 했다. 사무실도 그만뒀다며 몸은 괜찮냐고.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다녀간다는 이야기를 하며 다음에 올라오면 만나고 가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할 생각도 못했는데 어찌 잘도 전화질이다. 다음에는 먼저 전화를 해 봄직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친구의 용서가 생각나는지. 아직도 역사와 사회에 대해 미워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있으니 내가 살기 위해 용서를 해야 하나. 용서해야 할 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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