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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Feb 05. 2023

8. 게으름은 사람을 비루하게 만든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원인은 게으름에 있었다. 건강상의 문제를 야기한 것도 결국 나의 게으름이 자아낸 결과였다. 두 달간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나서 조금 우쭐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최고의 적은 게으름이라는게 한순간에 발각되고 만 느낌이다.


명절에도 약간의 징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넘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우선 육지에 계신 아버지댁과 장모님이 계신 요양원에 가지 않기로 했기에 집에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일탈을 무심하게 모른척하면 될 일이다. 내가 육식을 하던 채식을 하던 결국 이를 감시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 누구에게 숙제를 내거나 보고서를 쓴다던지의 일이 아니다. 내가 그리 하기로 한 거면 그리 하면 된다. 술을 안 마시기로 했으면 그냥 안 마시면 될 일이고 담배도 안 피우겠다면 그냥 안 피는 거다. 몸이 어쨌느니 딱 이번만 어떻게 해보겠다느니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결국 자신에게 약속하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는 것이지 다른 아무런 동기가 있을게 아니다.


채식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솔직히 숨어있는 식자재들이다. 고기나 회 등은 명백하게 이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멀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떡국 하나를 끓여도 예전처럼 사골국물에 끓일 수 없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뭐로 떡국을 끓여야 하는 걸까. 멸치국물이 내가 찾은 유일한 대안이기는 하지만 집사람에게 그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지금의 상황을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아무튼 명절은 멸치육수로 이런저런 식사를 해결한 느낌이다. 떡국과 채식만두가 식사 여러 끼를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모른 척 먹는 일반 만두 몇 개도 나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다. 

우스운 건 언제부터 채식을 해왔다고 고기를 보고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잘 생기지 않기는 하지만 가끔은 자연스럽게 고기에 젓가락이 가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느낄 때가 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늘 먹던 음식을 어느 순간 인위적으로 멀리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남아있던 조건 반사 같은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아직 이를 크게 어기지는 않았지만 사람 습관이 참 무서운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설 명절 이후 하루를 정리한 후 막무가내의 육지출장을 나섰다. 그동안 준비해 온 그리고 앞으로 준비할 사업아이템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혹은 사례를 살펴보기 위해 조금은 억지스러운 다양한 출장길에 나섰다. 6일의 기간이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이다. 덕분에 서울 가서 군대 갈 일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도 볼 겸. 


출장 장소의 대부분은 서울경기와 강원도였다. 지역의 음식을 먹고 숙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파악하고 참여해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출장의 주목적이었던지라 자칫 놀러 가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실 조금 불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웰빙과 힐링을 표방하는 숙소에 가서 그들이 내거는 힐링의 실체와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고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를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주요 출장 내용이었다. 물론 원주와 김포의 로컬푸드 현황을 파악하는 것도 출장의 일정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각 끼니마다 무엇을 먹느냐는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식집에 가서 나온 게장과 보리굴비의 유혹은 참 어려운 문제였다. 아내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달걀은 섭취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타협을 보긴 했지만 어류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준을 세우지 않은 상황이라 이를 어쩔까 생각이 많아졌다. 


동물성 단백질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교롭게도 탄수화물이었다. 야채가 자리를 많이 채워주면 고맙겠지만 그 이론은 현실상에서는 매우 쉽지 않은 일상이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탄수화물의 섭취량이 무지하게 늘었다. 하루종일 피곤하게 운전을 하고 다녔더니 저녁에 마시는 소주 한잔 혹은 양주 한잔의 유혹이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또 뭐가 있더라 간장게장을 조금 먹었던가, 굴비를 먹었던가. 젓갈은. 가락국수도 별로 탐탁지 않은데 몇 번인가 먹었던 기억도 난다. 떡볶이도. 물론 야채식단이나 조식뷔페에서라면 걱정이 없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6일을 돌아다니는 동안 여러 번의 내가 세운 기준에 일탈이 일어난다.


좀 더 많은 준비를 하거나 식당을 찾거나 먹거리를 준비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매 끼니마다 조금씩 발생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래서인가 다시 공복혈당이 조금씩 안 좋은 쪽으로 이동 중이다. 과일도 여러 개 먹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 여주 휴게소를 들렀다. 휴게소 정면에 큰 플래카드가 걸렸다. 비건을 위한 표고버섯 크림우동을 개시했다는 내용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기는 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비건메뉴를 크게 선전하고 있으니. 비록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들도 좀 더 많이 확대되겠구나는 생각은 당연한 귀결이다.

여행을 하게 되면 조심할 부분이나 준비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나야 껍데기만 채식을 주창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채식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나 같은 엉터리 비건에게도 세상의 유혹이 이렇게 많아 스스로를 비루하게 만드는데. 남의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다잡고 정진하는 마음으로 채식생활의 기준을 정리하고 찾아봐야 할 모양이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채식은 진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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