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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Nov 16. 2023

[에필로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시집 에필로그

막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인 중2가 되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싫지 않았다. 시험시간은 50분 동안이었지만 나의 모든 시험은 아무리 늦어도 30분이 넘지 않았다. 나머지 20여분 동안 나는 시험지의 여백에 나름 온갖 상상과 감정선을 이어가는 시 나부랭이를 끄적였다. 3~4일에 걸쳐 치러진 시험이 끝나면 나는 시험지를 모아 정답을 맞히는 대신 시험시간에 급히 끄적였던 빈 여백을 채운 나름 시 구절들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10여 개가 넘는 과목의 시험이 치러졌으니 시험기간이 끝나면 그 수만큼 시가 남았고 내 노트에 차곡히 쌓였다. 그 버릇은 고등학교 중반까지 이어졌고 내 기억 속에 가장 찬란했던 감정을 가진 시기였다. 


사람은 변할까.  사람들은 상황에 적응할 뿐이지 몇몇 가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를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 평생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사람에 대한 생각 등은 거의 고정된다. 다행히 성정이 유약하거나 감성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시와 글에 호의적이었던 나는 그 감정을 평생을 간직하며 살아왔다. 고등학교라는 입시지옥과 권위주의 교육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에 적응하며 살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사회인이 되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인생의 전부이긴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과 내 상태는 어떠한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들은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믿고 끝도 없이 아무 종이에 기록을 남기고는 잊어버리곤 했다. 


글 쓰는 게 직업이었던 몇 년간의 시간을 제외하고 글은 읽는 것에서 멀어지고 쓰는 것에서는 더욱 멀어진 삶을 살았다.  몇 번이고 삶의 궤적에 대한 단상을 짧게 적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실체 없는 추상적 단어만이 원고지나 빈여백에 낙서처럼 흩날렸고 곧 잊힌 쓰레기가 되어 나에게서 멀어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내가 명시적으로 원하지 않았지만 시의 형식을 띠든 정체불명의 잡문이든 자꾸 몸 밖으로 삐져나오려 했다. 내가 그 실체를 모를 뿐이었고 눈여겨서 바라보는 대신 순간의 감정고양에 따른 치기라고 외면해 버렸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계기가 있을 뿐이다. 시가 가지는 감정선의 표출노력을 고집스럽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자란 시대에 시인의 등용문은 언제나 신춘문예였고 그럴만한 문재가 없는 터였기에 잠깐의 꿈과 함께 잊힌 일상을 살아야 했던 일들은 수많은 작가 후보생들과 동일한 궤적이었다. 나에게 계기를 준 것은 제주 혹은 지방, 그리고 자연과의 친밀한 교류에서 비롯됐다. 인천이라는 서울의 위성도시에서 회색빛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30여 년을 넘게 살면서 도시의 정서는  나의 어린 시절 혹은 청소년기의 감정선을 끝없이 자극했지만 머리만 살아남은 사람에게 글은 의미 없는 전문용어나 추상적 단어들의  나열이었고 나도 모르고 읽는 이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외래어에 불과했다.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분명 몸 안에서 무언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했건만 그 결과는 언제는 알 수 없는 도시의 언어들이었다. 추상의 언어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딛고 넘어가지 않으면 쓸데없는 말장난이 된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갔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도한 몇몇 결과물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단어들의 유희였으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무병을 앓게 되면 이보다 더 심하겠지만 정체가 무언지 모르는 가슴앓이는 사람을 무지하게 답답하게 만든다.  


지방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인간이 무슨 자석에 쇳가루 붙듯 제주에 별안간 내려왔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터를 마련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자연을 탐했다. 경관이 우선 한 몫했다. 바다도 있지만 밭도 있고 오름도 있고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숲의 원시성을 지난 곶자왈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했을 때 나는 세상에 무지하고 쥐뿔도 몰랐지만 세상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단 한 구절의 가이드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이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해줄 멘토 혹은 제대로 된 선배가 없었다는 것이 맞다. 물론 그들도 똑같이 몰랐을 테니 내게 알려줄 말이 없었을 것이기는 했으리라. 그저 도시의 불나방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내 인간성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땅을 밟고 지방에 내려오고 제주에 오게 되면서 경이로운 장소를 오롯이 혼자 체험하고 그들의 소리에 길들여지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생을 리셋하듯 만남을 시작하고 나니 그때 몸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육지에서 만났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결코 노바디 Nobody가 아니라 몇몇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무병처럼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느 날 서귀포 바닷가의 올레길을 걷다 휴식을 구하는 벤치에 앉아 짧은 시를 쓰게 됐다. 시의 좋고 나쁨 혹은 표현의 완성도를 논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탈출구를 찾지 못한 시구절이 거죽을 뚫고 몸 밖으로 나온 순간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제주서 만난 형님께 기쁜 마음으로 첫 시를 썼노라고 자랑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일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이후 간간히 탈피하듯 거죽을 뚫고 나온 시구절이 있었지만 감성만 살았지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꽤나 시간이 지난 후 삶의 목표를 세웠다. 아닌 어린 시절의 목표가 생각났다. 시인이 되어야겠다. 여전히 어렵고 난감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시구절이라고 써 내려가는 횟수가 꽤나 늘었다. 다행이다. 한숨을 토로하듯 고해성사를 하듯 내 감성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났다.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마음을 조금은 자유스럽게 표출할 수 있게 돼서 너무나 다행이다. 사람이 자신을 반영하거나 표현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매개를 사용한다. 꽤나 많은 매개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몇몇 시도를 해봤지만 신통하지는 않았던 같다. 악기를 불어보던가, 그림을 끄적이던가, 무용에 심취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나에게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편은 결과를 글로 기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에서 화가를 만나고 음악가도 만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질투심을 느끼지만 어떤 경유에도 그들과 같이 없는 자신을 알기에 다름을 인정하는 선에서 스스로를 알게 된 듯하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서사적인 인과관계는 부족하지만 시점에서 자신을 가장 표현하는 방법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만연체의 글들이 가득하고 별 볼 일 없는 은유가 아재개그가 되어버리는 일이 허다하지만 그게 주변의 땅과 자연과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좌절하기에는 이르다는 결론을 이끈다.


모두가 그렇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언젠가 생각이 바뀔 수 있겠지만 시는 삶이 반영되지 않으면 사생아가 된다. 유럽 낭만파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죽음을 찬미하고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는 글귀를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시구절로 남겼을 때 그 격정에 나는 온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로트레아몽이든 랭보든 바이런이든 그들의 시구절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전하려 했던 그 격정만은 어느 정도 잔영이 남아있다. 그들은 천재였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삶이 온전히 반영된 시를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쓸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아쉽다. 내가 쓰는 시구절은 T.S. 엘리엇이나 에즈라 파운드처럼 지적 호기심과 역사적 혹은 신화적 은유가 한껏 가득한 글들이 아니다. 그들을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나의 도시생활 총 50년을 바탕으로도 그들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다를 보며 폭풍우를 맞으며 숲 속을 걸어 다니며 느낀 감정을 이야기를 구술하듯 풀어내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괜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경험도 샘솟는 이상한 경험도 하게 된다. 그 매체가 시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인가 삶이 바탕이 되고 순간순간이 기억되다 보니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구술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솔직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공교롭게도 이제 어려운 시는 싫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기 싫어졌거나 생각이 못 미치는 이유도 있을 테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다. 원래부터 추상화를 그리던 작가들을 인정할 수 없듯이 처음부터 어려운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허용의 범위에 있지 않다. 삶의 단면이 솔직하게 담기지 않는 문구는 다시 봐도 오글거리거나 외면하게 된다. 지방과 자연과 제주가 주는 고마운 결과가 아닐까. 언제나 그날의 감정과잉이든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이나 흐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조금 더 솔직하고 싶어 진다. 그 솔직함이 어떤 때는 철부지 소년 같거나 인생을 너무 재미없게 살아가는 나이 든 꼰대스러운 면도 있겠지만 삶에 솔직하지 않으면 스스로 쳐다보기 힘들다. 하물며 시라는 구절에 남아있는 영혼의 흔적을 좇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허무함을 쫒고 싶지는 않다.


느지막이 시집을 내고자 하는 희망을 품으면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한다. 당시의 환경에 적응할 수는 있어도 결코 본질적인 생겨먹음은 어쩌지 못한다. 그 변하지 않는 희망을 시를 쓰면서 본다. 10대 때 즉흥시인이라는 단어 하나에 괜히 가슴이 설레던 나의 청춘시절의 흔적이 아직 내 몸 어딘가에 남아있음을 깨닫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일이다. 내 시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작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는 그래서 꿈을 꿀수록 좋은 일이다. 시를 더 쓰기 위해서라도 지방에서 살아야겠고 제주에서 살아가야겠다. 다소 답답함이 있더라도 눈을 돌리면 모두가 나의 놀이터이자 스승이 되어버리는 삶의 터전이 있기에 시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어찌 제주의 환경에서 지내면서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 생긴 대로 하나씩 적어나가니 시집이 된다.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좋다. 비록 그 삶이 여전히 이곳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지만 도시에서 꺼내보지 못한 속마음을 꺼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삶이 조금씩 녹아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시는 이제 삶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색다른 기억의 언어로 저장하는 클라우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다음은 서사를 이어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터전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바다와 산과 오름과 숲이 있으니 가능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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