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꽃이 피었다>(삶창, 2023)
시집이 나왔다. 어려운 과정이고 긴 시간들이다. 요즘 누가 시를 읽는다고 시집을 낼까. 호들갑을 혼자 떠는 거지 아무도 관심도 없는 분야인데 정작 당사자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힘들고 어렵고 부끄럽고 그렇다. 참 묘한 일이다. 누군가 서점에서 사줄 일도 없을 텐데 괜히 yes24와 교보문고 온라인판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괜한 뿌듯함이 앞선다. 남들은 나름 섹시한 주제와 제목을 들어 책을 기획하고 열심히 집필하고 앉았는데 고리타분한 시집이라니... 뭐라 지적질을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개인 창작집을 낸다는 일은 스스로에게 칭찬을 한다. 지적질에 버텨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 벌써 수십 년 전이기도 하니 사춘기의 감성 안에서 시는 소설과 달리 굉장히 멜랑꼴리한 영역이었고 낭만적인 분야이기도 했다. 대학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제주에 내려오면서 다시 글을 쓰고 시 나부랭이를 끄적이는 연습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아마 제주의 자연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일깨워준 눌려왔던 감성이 표출됐던 것이라고 본다.
아주 우연히 서귀포 보목항의 섶섬 앞을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끄적이던 싯귀절이 시작이었고 그걸 아는 형님에게 시를 쓰게 됐노라고 자랑하며 술을 한잔 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분은 불과 몇 년 안에 허망하게 연락도 없이 세상을 뜨셨지만 그분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잘했다고 격려해 주던 모습은 잊히질 않는다.
뭔 일을 하면서 다 늙어서 시를 쓰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육신이 나이를 먹지 정신은 젊어지는 법이란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토록 수많은 어른들이 마음은 청춘이라는 넋두리의 실체를 나 역시 가까이 근접했으니 역으로 늙었나 보다.
새롭게 이사 온 조천의 와산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나는 오름과 바다를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산다. 경치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산책하면서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숨소리도 역시 덤으로 얻은 아주 중요한 삶의 자산이다. 그 안에서 시가 나오는 걸 보니 세상에는 때가 있는가 보다.
잔소리가 길었지만 22년 가을 잡지 두 곳에 신인문학상으로 선정되고 문예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시집을 낼 수 있는 토대를 열었다. 쉽게 될 줄 알았던 책 편집이지만 출판사 측에서 어렵게 꼼꼼히 봐준 덕에 거의 6개월에 걸쳐 책이 나왔다. 단순하다. 책 표지에 다양한 모습을 선보일 기회대신 단색이 덮였다. 이전의 기행문책도 단색이었는데 나와 단색이 어울리는 모양이다. 자꾸 단색을 권하는 걸 보면.
55편을 실었다. 자연과 사랑과 인생의 단편을 이야기하는 올드한 이야기지만 쉽게 쓰고 싶었다. 어려운 문구를 꼬아가며 알듯 모를 듯 한 문구를 시의 이름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시집을 낼지 알 수 없으나 시집을 낸다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근데 내가 쓴 글인데 다시 읽는 게 이렇게 부담스런지. 글은 여러모로 어렵다.
제목이 된 시구절 하나 올려본다.
부추꽃
부추 한 단을 훠이훠이 헹궈서
서너 조각으로 잘라
오이소박이에 버무려 넣은 날
들판의 아무 풀떼기나 끊어 넣으면
다 먹는 풀이되는 줄 알았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오이소박이 끝물에는
언제나 부추만 남았고
풀떼기를 빼놓고 먹던 습관은 오랜 기억이 되었다
아내가 해주는 오이소박이는 모양새는 달라도
역시 부추가 들어가 맛을 살렸고
오이 없이도 부추만을 집어삼키며
맛을 음미하는 나이가 됐다
정구지라고도 했고
솔이라고 세우리라고도 했지만
난 여전히 부추가 익숙하다
어머니 마지막 가시기 얼마 전
더 이상 특별한 치료법이 없음을 알고
못내 아쉬워하셨지만
의사 말대로 부추김치는 힘겹게 씹으셨다
마당이 생기고 자투리 텃밭에서 자란 풀이
온갖 잡초와 함께 자라다
어느 날 꽃줄기를 힘차게 밀어 올리더니
하얀 꽃 봉우리를 슬쩍 펼치다
기어이 흰색 꽃을 피웠다
부추에 꽃이 피었다
내가 잘라 밥상으로 가는 길을 잃었더니
앙증맞은 꽃줄기 끝에 작은 꽃잎들을
조밀하게 연다
꽃자루를 만들어 다음 생을 키우려 한다
오늘 못 보낸 기억을 담아
또 하나의 자연을 가슴속에 들여놨더니
도시가 한 발짝 내게서 멀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