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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이 편해졌다

by 너구리

잔머리 돌리는데 익숙한 인생이다. 평생 이런저런 종류의 잔머리를 돌리며 나름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고 애쓰며 살아왔고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몸이 지쳐간다. 한때 암수술도 받고 당뇨 진단도 받고 건강이 안 좋다는 자평도 하면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즈음. 본격적으로 가장 슬픈 일 중 하나는 내가 생각해도 능력이 모자라 예전부터 그럭저럭 해오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다. 육체노동이야 어찌어찌 버텨보겠는데 기획한답시고 굴려대던 머리가 아무리 해도 해결책을 못 찾고 커서만 깜빡이는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슬퍼진다.


그래서인가 어느 순간부터 글도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예전처럼 어느 곳에 다녀오거나 하루 종일 걷다 보면 그때의 심정이나 소회를 마치 현실에 있는 것처럼 마구 휘갈리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당연히 그러지 못하다. 아니 그날 하루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중에 내가 찍은 사진을 핸드폰에서 찾아보곤 놀랜다. 이런 곳을 다녀왔다니...


요즘 들어 매장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그동안 제주 동쪽에서 카페를 열고 간식을 파는 가게를 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매장이전을 추진하면서 불가피하게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가게에 자주 나간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이유 중 하나는 예전보다 정리하거나 손봐야 하는 공간이 늘어서다. 여전히 신경 써야 할 일이 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서투르던 가게일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음식이나 음료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주변일을 하는데 익숙해진 때문이다. 매장 마감 후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거나 화장실 휴지 정리하는 일, 들개의 변을 뒤처리하는 일 등이 내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단순노동이 꽤나 잘 맞는 거 아닐까.


며칠이고 가게로 출근하고 바로 집으로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다. 사무실 출근 대신 노트북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시대적 장점을 십분 살리며 인터넷과 전화로 일을 하고 몸은 가게에서 일하는 시스템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그러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식사 후 자연스럽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한다. 어찌 보면 단순한 생활인데 그 생활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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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단순하게 사는 것도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매일 정해진 일과를 처리하고 퇴근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나쁘지 않다. 가끔가다 시내로 나가 다른 일을 보고 약간의 일상에서 벗어나 보는 일 정도면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터에서 일하는 게 나쁘지 않다. 그런 생활이 싫어 별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일평생을 지지고 볶았는데 뒤늦게나마 단순함의 깊이를 알게 되니 참 다행인 일이다. 그 다행이 느껴져서인가 오랜만에 자판을 두드릴 용기가 생긴다.


어쩌면 나이 때문이겠지만 루틴을 따라 일하고 일 년 중 시간을 나누어서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테지만. 사실 요즘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을 만나는 일이다. 만나는 인간들마다 얽혀있는 관계가 뒤틀어져 있기에 사람을 안 만나면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 느낌이다. 인간이 가장 따뜻하고 즐거웠던 대상이었다. 그 대상이 가장 기피하는 상대로 바뀌는 현실. 내가 성질이 나빠진 건가 아님 유약해졌는가 알 수 없지만 뒤틀어진 관계가 회복될 것 같지도 않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 지쳐서일까. 인간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이래서 AI가 필요한 게 아닐까. 쓸데없는 데까지 생각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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