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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문 Nov 20. 2018

빛과 어둠의 마술사

'자신'과 '대중' 사이에 고뇌한 화가. 렘브란트






17세기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세계의 무역의 중심지였다.
 근대의 가톨릭도 네덜란드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렘브란트, <직물조합의 간부들>, 1662년, 캔버스에 유채



당시 네덜란드는 무역을 통해 돈을 번 부르주아(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런 상인들의 일에서 종교나 사상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 속 렘브란트는 부르주아의 아들로 태어났고,

편안한 삶이었던 부르주아의 신분을 거부하고 화가의 길을 걷는다.



렘브란트, <자화상>, 1633년, 캔버스에 유채



당시 갓 스물의 렘브란트를 보라. 부유한 상공업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의 모습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벨벳가죽으로 된 옷과 더불어 옷에 있는 금속장식은 한눈에 보더라도 귀한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로서도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그렇게 높은 대우를 받지 않았다.

많은 재물을 뒤로 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의 길을 택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렘브란트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당시 부르주아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부르주아들은 영원히 기억하기를 원했다. 그런 와중에 전통 가톨릭의 성모상들의 그림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또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여러 공동체모임들이 생겨나고, 많은 공동체에 들어갈수록 힘있는 사람으로 대우받았다. 사진도 없는 그 당시에는 그림이 기억하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을 때. 초상화는 폭발적인 수요를 가지게 된다. 



렘브란트, <암스테르담 직물 제조 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는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옅게 나타난 빛과 그에 대비되는 강렬한 어둠.

그의 특유의 마술적인 색감은 부르주아의 취향에 딱 맞는 것이었고, 그는 성공가도를 달린다.

엄청난 양의 초상화 의뢰가 들어오고, 그는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





렘브란트의 몰락


이런 와중에 렘브란트는 한 민병대의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된다.

여러 의뢰를 통해서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렘브란트의 몸값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 렘브란트에게 의뢰를 받긴 민병대도 거액을 약속하고, 의뢰한 민병대 대원들은 그에게 대작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렘브란트, <야경>, 1642년, 캔버스에 유채, 363cm(!) X 438cm(!)


그러나 이 그림이 완성되고 나서는 렘브란트는 몰락한다.

작품이 완성되고, 이 그림을 본 민병대는 작품의 인수를 거부한다.

그들이 인수를 거부한 이유는 2가지 였다.

첫째로, 집단초상화는 1/n을 부담해서 만드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크기로 그려져야 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림에서 각자 다르게 비중을 두었다.

그림에서 어떤 이는 매우 밝게 드러나고, 어떤 이는 매우 어둡게 드러났고, 

이는 자신이 나오길 원한 민병대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었다. 


두번째로, 왠 모르는 여자가 그림 한가운데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내인 사스키아를 모티브삼아 그린 소녀는 민병대원들에게는 전혀 낯선 사람으로 비추어졌고,

당시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크나큰 모욕으로 느껴졌다.

위의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민병대'는 렘브란트의 그림의 인수를 거부했다.







화가의 고뇌


민병대원들과의 갈등은 네덜란드 사회에서 크나큰 이슈가 되고,

신용으로 먹고 사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의 신용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의뢰주에 기분에 맞지 않을 뿐더러, 당시의 관습에서 벗어난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악명은 순식간에 퍼졌다.

결국 그는 어떠한 의뢰도 받지 못하고, 삶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이후 렘브란트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 그의 삶에 대해 유추할 수 있다.

얼굴을 보라, 그 이후 렘브란트의 삶은 피폐해지고 만다.


렘브란트가 자신의 예술을 찾아 나가면 나갈수록 대중들은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고흐 이전에 대중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화가의 '전형'이었다.

초상화 의뢰를 받지도 못하고, 다른 모델을 사지 못하는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그리는 데에 몰두했다.

앞의 당당한 렘브란트와 노년의 렘브란트를 비교하면, 답답해진다.






오늘날 그의 그림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앞서 말한 야경, 렘브란트의 초상화들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받으면서 진열되고 있다.

그는 성공했었지만,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 대중들의 차가운 외면을 받아 비참하게 생을 마친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예술이 자신의 삶을 바쳐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때 과연 누가 맞고 틀렸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가 말했던 찬탄한 색깔과 빛, 그림자는 아직도 네덜란드에 머무른다.


"이 노화가의 삶에서 당신은 무얼 느끼는가? 당신의 개인적 이념은 무엇인가?"

"혹시 당신은 아무런 이상도 없이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중요한 것만 골라서 배반하면서....."

(진중권, 미학오디세이 3권, 135p 발췌)





다른 부분에서



그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과 사람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현재 인공지능을 통해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NEXT rembrandt"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방문하셔서 렘브란트 특유의 화풍과,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나아갈지에 대해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https://www.nextrembrandt.com/


<인공지능이 그린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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