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아이나 청년과 관련된 사회 문제를 두고, TV에 나온 어른들이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걸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저는 좀 허탈했어요. 그래서 제가 기성세대가 됐을 땐 ‘미안하다’라는 말을 최대한 적게 하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이를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과 덧붙여 생각해 봤습니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어느 날 나에게도 입사제안이 왔다
교육 업계에서 콘텐츠 라이터(Content Writer)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직장 직속 상사 분께서 옮겨간 회사에서 콜을 해주신 것이다. 함께 일할 때 내가 늘 잘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날 떠올려주시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시기적으로도 당시 직장의 퇴사를 결정한 시점이라 이직이 수월해지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망설이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스타트업을 다닌 이래로 회사를 볼 때 ‘이 기업이 왜 탄생하게 됐는지’에 대해 집중해서 보게 됐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회사에서는 ‘브랜드 스토리’가 코어가 되어 직원과 투자자를 불러 모으고, 초창기 멤버들에게 반복되어 구전되며, 업무와 회사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 봐왔기 때문이다. 하여 CEO의 창업 이유에 공감하고, 내 역할이 있다고 판단될 때 회사에 지원하곤 했다.
처음 ‘교육 업계’에서의 입사제안이 왔을 때 이런 종류의 회사를 떠올렸다.
교육에 테크를 접목해 장소 제한 없이 수강생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기업
평생교육 및 재교육을 위해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기업
그러나 제안을 받은 곳은 영아부터 입시생까지 다닐 수 있는 ‘사교육 업계’였다. 학원 기업의 브랜드 스토리는 이랬다.
‘학구열이 높은 지역에서 한 강사가 학원을 차렸는데 개업하자마자 대박이 났다.
점점 지점이 늘어났고 후에 이 학원은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학원 브랜드가 되었다.’
가치 지향적인 회사는 아니었지만 하나의 학원이 지점을 늘려 중견기업까지 된 것은 놀라운 사업적 성과였다. 동시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이 교육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는지 실감했다.
가지 않겠습니다
브랜드 스토리를 보고 나니 마음이 끓는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교육 업계에 내가 발을 담그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사교육이 아이들에게 협력보다 경쟁을 심화하는 점, 부모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점이 마음에 걸렸고, 특히 이 모든 것들이 가정을 꾸려나갈 청년 세대들에게 교육관, 경제관 측면에서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늘 생각했다.
새 일을 시작하신 전 상사 분께 사교육에 대한 나의 솔직한 견해를 밝히긴 힘들었다. 나의 부담을 아셨는지 그분이 나를 설득하고자 저녁 식사 약속을 제안하셨다. 회사와 직무에 대해 설명을 더해주시겠다고 했다. 거절의 어려움과 연락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식사 자리에 나섰다.
하지만 나의 직감이 맞았다. 식사 이후에도 ‘사교육 업계’에 대한 호불호는 반전되지 않았다. 며칠 후 메시지로 내 의사를 전달드렸다.
“제가 관심 있는 직무로 제안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뜻밖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교육 시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요ㅠㅠ
이제 막 퇴사를 했으니 다른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출근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과 합을 맞춰봐 검증되고, ‘콘텐츠 라이터, 카피라이터’로서 빠르게 업무에 투입될 사람이 꼭 필요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단기 프로젝트 업무로 함께 일하기를 재차 요청하셨다. 연락은 상쾌하게 왔지만 어렵게 꺼낸 얘기실 것 같아 내 생각과 계획을 돌렸다. 일정에 상관없이 그 일을 해보기로 했다. 그분의 새 직장, 첫 프로젝트를 ‘도와드려야겠다’는 동기가 생겨버렸다. 친한 친구가 “같이 일했던 상사가 불러주시면 업무가 어쨌든 따라가 보는 것이 맞다”라고 해준 말도 생각났다.
곧장 그 학원 회사에 출근했고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내게 맡겨진 업무는 학원 전 지점에 배포될 첫 ‘브랜드 플레이북’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었다. 회사 구성원이 외부에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브랜드 언어를 다듬는 것... 솔직히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맞았다. 일을 하면서도 언어가 정리되니 계속 확신이 들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 일이 버겁게 오면 개인 성장이 있고,
이미 잘하는 것으로 업무를 하면 개인 생활에 안정감이 생긴다.
스타트업에서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일로 자신을 갱신하며 바쁘게 살았는데, 중견기업인 학원 본사 직원들은 학사 일정과 맞춘 루틴한 업무로 큰 동요 없이 일하는 것 같았다. 일의 장단점이 보이니 단기 프로젝트 이후에도 이 일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 만나는 친구들마다 의견을 물어보고 다녔다.
사교육에 대한 인식은요...
“내가 사교육 업계에서 일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난 사실 사교육 업계가 우리 사회를 조금씩 병들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하며 이 업계에 대한 나의 인식도 밝혔다.
학창 시절, 쉬는 시간마다 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물으러 가던 친구, 그 친구는 한의사인데 자신의 경험을 내게 얘기해 줬다.
“고2 방학 때 서울에 올라가서 대치동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 학원이 목표 점수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게 하더라”며 “학원을 아이들이 원하는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곳으로 생각해 보면 어때?”하고, 사교육의 긍정적인 면을 내가 볼 수 있게 했다.
지금 초등학교 현직 교사인 다른 친구는 “나 역시 사교육을 받고 교대를 갔고, 대학생 때 과외로 용돈을 벌었다”며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너게 필요한 것만 생각해서 들어가 봐”하고 입사를 추천해 주었다.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 나니 학원 본사에서 일하는 것에 마음이 열리는 것 같았다. 사실 사교육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아이를 맡기는 돌봄 공간이 되기도 하고, 학업에 의욕적인 친구들은 교육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잠재력을 끌어올리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학창 시절 과외와 학원, 학습지와 인터넷 강의까지 알차게 이용하며 전진했다. 성적에 도움이 됐든, 불안을 다스렸든 사교육으로 열심을 흉내냈다.
학원가, 마음에 밟히는 문장들
그러나 다시 업무로 돌아오면 여전히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었다. 그 회사의 핵심 키워드였는데, 이를 교열교정하면서도 거부감도 동시에 들었다.
상위 0.001% 영재 교육
최상위 학습
미래 진로 선택권을 넓히는 교육
나는 학원 브랜드의 이런 문구에 맹점이 있다고 느꼈다. 인성 교육까지 바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솔직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회사원처럼 ‘효율과 성장’만 강조하고 있다.
0.001%에 든다는 건 일부일 텐데, 여기에 들지 않는 친구들에 관한 보완책은 보이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미래 진로 선택권이 좁아질 수도 있다는 걸 놓치고 있다.
모든 걸 설계해 주는 교육을 하면서 아이들의 '주체적 학습', ‘창의력’, ‘사고력’ 증진을 논한다.
커리큘럼이 체계화되는 과정이 수강생 모집과 연관되다 보니, 자칭 교육 전문가들이 너무 이른 교육, 지나친 교육을 권고하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학원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세상이 된다.
(▶출처: SBS비즈 “저출산, 첫째는 집값·둘째는 사교육비 때문”)
단기 프로젝트는 회장님 보고를 통과하고, 내부 승인이 끝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지만 이 업계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 사업들이
아이들을 태어나지 못하게 할 거예요
사교육 업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내가 그곳을 직장으로 선택하고 힘을 보태느냐, 안 보태느냐에 따라 달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학원 기업이 책임지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 얼마나 많으며,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도 얼마나 끌어올렸겠는가. 이 업계도 공교육에서 채우지 못한 틈을 발견했기에 발달된 사업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교육의 성행이 일부만을 좋은 곳에 데려다 놓고, 전체를 괴롭게 하고 있다고 짐작한다. 길게 봤을 때 아이를 위한 사업들이 아이들을 태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미안하다"를 적게 말하는 기성세대가 되려면…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한국 서울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청년의 때에 선택에 주의를 기울여 내가 기성세대가 됐을 때 다음세대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적게 하고 싶다. 가끔 TV에 나온 기성세대들이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래도 당신은 책임을 느끼고 있군요'라고 담백하게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이미 망가진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어른들이 하는 말 같아서 늘 허탈했다. 혹은 실제로 “미안하다”라고 말해야 하는 당사자는 가만히 있고, 그 바깥에 양심 있는 사람이 대신 사과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압력에서 나온 이야기, 무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하는 말 같다고 할까.
훗날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적게 하려면
지금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어떤 물길로 나아갈지, 어떤 물살에 힘을 보탤지
작은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게 아닐까.
내게 오는 모든 제안이 기회는 아니다. 이제는 ‘기회인 것’과 ‘지금만 기회인 것들’, ‘기회로 보이나 모두가 망가지는 것들’, ‘기회가 아직 없지만 기회로 만들어야 할 것들’을 펼쳐놓고 선택을 해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구직자로서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도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
1) 대행사보다는 한 브랜드를 담당하는 곳
2) 반복적인 업무가 아니라 기획을 요구하는 곳
성장의 자취(결과물)를 남길 수 있는 곳
3) '언어, 글'과 관련된 콘텐츠 업무가 맡겨진 곳
4) 디자이너와 협업할 수 있는 곳
5) 재화보다는 서비스를 비즈니스 모델로 삼는 곳
6) 직접 사용해 볼 수 있는 서비스일 것
7) 캐릭터를 활용한 페르소나 설정이 가능한 곳
8) B2B보다는 B2C를 하는 비즈니스로 더 낮게, 쉽게, 인간 친화적으로 타깃에게 말을 건내는 곳
여기에 하나 더 추가 됐다.
9) 우리 사회가 아직 실현하지 못했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하는 곳
나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업계에 발을 들이고 싶다.
그래야 회사로 향하는 매 걸음마다 뒷걸음질 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작가의 말]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이상이 높구나’를 절감했습니다. 입사 제안이 저한테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덥석 붙잡지 못했어요. 자발적 의지가 들어갔지만 ‘못했다’라는 표현이 더 와닿습니다. 눈 딱 감고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어요. 늘 젊다고 생각하지만 뒤에 사람이 계속 태어나고 있습니다. 순번을 지키다 언젠가 기성세대가 되고 말 거예요. 그때 다음세대를 허탈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음세대가 제도의 결정권자가 아닐 때 미래의 단초는 여기에, 결과의 출처는 오늘을 사는 나에게 있으니까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글로 정리해 두고 후에는 직감에 따라 살 거예요.
그래서 어떤 기회는 여전히 놓칠 것이고
어떤 제안은 쫓아가 반드시 붙잡을 겁니다.
"미안하다"를 적게 말하는 기성세대가 되고 싶습니다.
ⓒ arazuda all rights reserved @스위스 루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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