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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Dec 01. 2023

엄마라는 이름이 '완벽'은 아니야.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다.

나의 꿈에는 '현모양처'가 있었다.

직업적인 꿈도 있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있었다.

아마도 나의 원가족(결혼하기 전의 가족체계)의 관계 중 엄마와의 관계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결혼 전, 누군가가 "너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일관성 있는 엄마, 따뜻한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모습은 내가 기대했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무려 '현모양처'와 '일관성 있고, 따뜻한 엄마'가 되고자 했던 내가 엄마가 되었다. 게다가 심리상담을 전공하고, 소아청소년정신과에서 아동청소년을 상담하기도 했으니, 나는 좋은 엄마가 될만한 이론과 실전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말을 못하던 시절엔 아이와의 관계가 문제가 없었다. 울거나 찡그리면(문제 발생), 이유를 찾아 문제를 해결해 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아이가 '자아'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18개월부터였는데, 아이는 아이의 자아로 존중받기를 원했고, 엄마인 나도 나의 자아로 존중받기를 원했다. 그렇게 두 자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건은 아이의 목욕시간에 발생했다. 목욕은 하고 싶지만, 바지는 벗기 싫다고 징징대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타이르며' 욕실에 들어갔다. 물로는 씻겠지만 비누칠은 하기 싫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타이르며' 씻긴다. 이제 목욕을 마치고 나와야 하는데 더 놀겠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타이르다' 내가 그만 화가 나 - 더 정확히는 차곡차곡 쌓이던 화가 넘쳐 -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욕실은 특히 소리가 울려 큰 소리가 더 커지는데, 태어난지 두 돌도 안 된 아이에게 내 화에 못 이겨 윽박지르고, 아이는 놀라서 울고, 더 큰 소리로 울고, 이에 질세라 나도 지지않고 더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이건 마치 누가누가 더 목소리가 크나 내기하는 듯했다..)


기억하는가? 나의 꿈.

나의 꿈은 '현모', '좋은 엄마', '일관적이고 따뜻한 엄마'라는 것을..


그렇게 작은 아이를 데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순간 내 머릿속을 지나가던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어린 시절 나와 엄마의 모습이었다. 내가 4-5살쯤 되었을까. 고집 부린다며 엄마에게 혼나다가 고집을 꺾지 않는 내 모습에 화가 더 난 엄마가 아주 무서운 표정과 화난 말로 혼내던 - 빗자루로 몇 대 맞던 - 장면이었다. 엄마의 무서운 표정과 말투가 잊히지 않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종종 생각나는 장면인데, 세상에...내가 내 아이에게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컸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픈 장면을 고스란히 아이에게 반복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이 컸다. 이대로 아이와 살다가는 10년 뒤쯤 나는 괴물엄마(아이를 공감하기는 커녕 지시와 요구만 하는 권위적인 엄마)가 되어 있을 것 같았고, 아이는 사춘기가 되었을 때 나를 미워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았다. 내가 원하던 삶과 180도 다른 끔찍하고 슬픈 결과가 되도록 둘 수 없었다.


그 날부터였다. 엄마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물리적인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내가 되고 싶었던 좋은 엄마의 요건은 내 어린 시절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마주하고 해결해야 내 아이와의 관계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게 좋은 엄마는 없다는 것. 그냥 나답게, 이만하면 충분한 엄마가 되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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