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소연 Feb 28. 2016

로라에게 부치는 서(書)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촛불, 연극 '유리동물원'

당신의 유리동물원을 엿 본 적이 있다. 그곳엔 낡은 축음기를 돌리다 하릴없이 사라져버린 아버지와 떠도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헛된 미래를 꿈꾸는 어머니와 지난한 가족의 생계에 짓눌려 매일밤 영화관에 쏘다니는 남동생이 있다. 그들은 방랑을, 과거를, 자유를 그리며 꿈꿀 수 없는 현실을 꿈꾸기에 매달린다. 



당신은 그들의 위태로운 꿈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당신의 동물원에 진열해놓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작디작은 손으로 촛불을 켠다. 촛불 속엔 당신의 행운과 행복을 열렬히 비는 어머니도, 당신의 절뚝이는 다리에 마법의 스카프를 매어주는 남동생도, 꿈속인 듯 홀연히 뛰쳐나온 당신의 첫사랑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촛불 사이로 소리 없이 쿵쿵 새어든 화려한 간판의 불빛들은 당신의 유리동물원을 서서히 잠식해간다. 날카로운 첫 키스는 산산이 부서진 무지개 같은 오묘한 빛을 내며 유니콘의 뿔을 빼앗아 휘청거리는 거대한 현실을 들이민다. 숨만 쉬어도 깨어질 듯한 어머니의 절망 너머로, ‘쓰러져가는 경제라는 점자책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공부해야’만 하는 멍에로부터 도망치듯 집을 떠난 남동생 너머로, 당신의 유리동물원은 당신의 다리처럼 절뚝이고 있었다. 



실상 당신의 유니콘에는 뿔이 없었다. 그 뿔은 일말의 희망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허상이었다. 그 말은 한 귀퉁이가 뜯겨진, 당신을 닮은 저 거울처럼 다른 말들과 결코 정다워질 수 없는 별스러운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오롯이 당신의 촛불 속에서만 마법처럼 빛날 수 있었다. 마치 당신의 가족들처럼 말이다.


설사 지금 시대가 전깃불로 밝혀지는 세상일지언정, 아니 그보다 더한 색색가지의 조명들이 세상을 밝힌다한들 당신 앞에 남겨진 단 하나의 촛불만은 결코 끄지 않길, 끝내 꺼지지 않길 바란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여전히 초에 불을 붙이고 있을 이들을 위해, 당신의 유리동물원처럼 절망하듯 꿈꾸는 그 누군가를 위해.


여기 당신을 위한 단 하나의 촛불을 켠다. 



사진_명동예술극장

작가의 이전글 『안나 까레니나』와 영화 '색,계'의 콜라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