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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Feb 24. 2021

‘나’를 부정한 당신에게, #정인아 미안해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일드 ‘마더’ 속 지금

극 속 아이들, 유키, 레나, 그리고 고(故) 정인 양

태어났기에 버려졌다. 태생을 부정당했기에 아이들에겐 삶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앙상한 몸이 차갑게 식어갔지만 사회도 국가도 그저 먼발치에 서 있었다. ‘남의 집 가정사’라는 울타리가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방패막이 된 까닭이다. 생명이 부정된 순간 학대도 시작됐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와 일본 드라마 ‘마더’ 속 아이들에게 인권은 사치였다. 극 속 엄마들은 어린 나이에 의도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아빠란 존재는 타인에 불과했다. 귀한 생명의 탄생이었지만 귀히 여겨질 수 없는 탄생이었다. 아이들은 어쩌다 피어난 하수구의 들꽃처럼 두서없이 태어나 생존만 남은 삶을 위태롭게 이어간다. 사랑의 결실이 맺은 탄생이라기엔 삶은 참혹했다.

‘아무도 모른다’를 봤다면 작아진 삑삑이 슬리퍼에 조심스레 발을 끼우던 유키를 기억할 것이다. ‘마더’를 봤다면 “한 번 더 날 유괴해줘”라고 말하던 레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버려진 공을 주워 즐겁게 놀던 소년의 텅 비어가는 눈도, 캐리어에 담긴 채 세상을 떠났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아이의 차가운 손도, 붉은 줄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가녀린 목도, 쓰레기봉투에 버려져 있던 자그마한 몸도 잔혹한 잔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정인이 사건’(양천 아동학대 사건) 이후로도 아이들은 생후 2주 만에 학대로 숨지거나(생후 2주 영아 학대 사망) 빈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고(구미 영아 사망), 물고문으로 죽거나(용인 물고문 사망) 탯줄도 떼지 못한 채 창밖에 던져져(고양 신생아 사망) 생을 마감했다. 속수무책으로 방치되어 있던 아이들의 비극은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려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죽음은 개인의 ‘가정사’에만 국한된 문제인가. 훈육을 위한 처벌이었다는 가해자들의 당당한 진술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어쩌면 가해자들 역시 피해자로 살아야 했던 시간들이 존재했던 걸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과연 모성애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인가. 친모의 영아 유기 및 살해는 왜 계속되는가. 결국 아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한 건 이 모든 비극은 모르는 척 사태를 방관해 온 어른들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뒤틀린 인식 속에서, 가해자 단죄에 그치는 땜질식 처벌 속에서, 가정의 안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떠넘겨버린 국가 앞에서 아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사회적 약자 중 최약체인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내지 못하는 국가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아동 관련 예산이 적은 이유는 우리나라 어른들이 이를 덜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아동의 인권, 안전, 복지, 생명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 “예산이 결국 국가의 책임감을 드러내는 가늠자라고 할 때 우리나라는 회피 수준이다. 아동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주양육자의 행복과 삶의 질이다. 사회적 지원 없이 개별 부모에게 책임을 돌려서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할 수 없다.

  **아동은 타고난 생명을 보호받으며, 건강하게 자랄 권리가 있다. 정부는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6조)


『아동 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위)과 『어린이의 권리를 선언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약속, 유엔 아동 권리 협약)』중 일부


어른이, 사회가, 국가가 바뀌지 않는 한 아이들은 출구 없는 지옥 속에서 오늘도 소리 없이 죽어갈 것이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참고문헌
*류이근·임인택·임지선·최현준·하어영, 『아동 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시대의창, 2019.
**반나 체르체나(지은이)·글로리아 프란첼라(그림)·김은정(옮긴이), 『어린이의 권리를 선언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약속, 유엔 아동 권리 협약)』, 봄볕,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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