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
매일 아침 일어나면 노란 불빛의 공기청정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아파트 바로 앞 동이 자욱한 미세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우울한 인도의 겨울이 드디어 끝났다. 요즘 인도의 날씨는 최고로 아름답다. 공기는 청량하고, 새싹이 돋아난 나무들은 초록색을 뽐내며, 하늘은 파랗다. 바야흐로 라운딩의 계절이 온 것이다.
많은 한국인 주재원 아내들은 인도에서 골프를 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도라는 나라가 길거리를 자유롭게 다니기 어려워 즐길 거리가 딱히 많지 않고, 한국보다 골프장 비용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골프를 배웠다. 작년에 처음으로 인도에 왔을 때 넘쳐나는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워 골프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정해진 몇 회의 레슨이 다 끝나갈 무렵 들었던 생각은 '대체 누구와 골프를 치지?'였다. 그렇다. 골프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운동이다. 함께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 골프를 치기 위해 누군가를 사귀어야 하나? 새로 사귄 사람이 골프를 치지 않을 수도 있고, 골프를 친다 한들 그 사람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와서 친구조차 없는데 하물며 골프 친구라니 막막했다. 인도에 주재한 지 몇 년이 지난 골프 친다는 한국 엄마들은 이미 끈끈한 골프 크루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골프를 칠 수 있을까.
라운딩의 시작,
골프 치자고 하면 무조건 따라나서기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골프 치세요?"라는 질문은 이곳에서는 가벼운 안부 인사와도 같다. 골프 친다고 하면 "언제 한 번 치러 가요." 혹은 "한 번 같이 칠래요?"와 같은 물음이 이어지는데, 처음에 나는 "초보라 너무 못 쳐서 좀 더 연습하고요."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몰랐다. 초보는 누군가 골프장에 데려가 준다 할 때 따라나서야 골프를 쳐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열일 제치고 그 귀인을 따라나서야 비로소 필드 입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별로 친한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이 낯선 곳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게다가 골프 초보인 나에게 먼저 골프 치자고 해 준 그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고, 골프 끝나고 밥 한 번 사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골프를 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 친해진 사람들이 골프를 칠 확률도 높다. 나 같은 경우도 그랬다. 학교에서 먼저 알게 되어 친한 사이가 된 엄마들이 내가 막 골프에 입문한 그때 본격적으로 필드를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정 골프 멤버가 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런 경우는 꽤 운이 좋은 경우였다. 많은 엄마들이 부임하고 나서 시간이 흘렀는데도 골프 칠 마땅한 멤버를 찾지 못하거나, 혹은 같이 치는 멤버의 귀임으로 골프 칠 사람이 사라지는 경우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 골프를 칠 누군가가 있다고 해서 다 골프를 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골프를 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이동 수단의 자유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도 마찬가지로 골프장은 도심과는 좀 떨어진 곳에 있다. 골프장까지 가려면 당연히 차를 타고 장시간을 가야 한다. 문제는 엄마들은 남편이 회사 간 사이,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 골프를 치기 때문에 차를 사용할 수 있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남편 회사에서 차가 돌아온 후, 혹은 아이들 학교에서 차가 돌아온 후에 그 차를 타고 골프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잘 맞고 친한 사람과 치는 경우는 카풀하면 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사 몇 번한 사이에 치는 경우라면 "제가 차가 없으니 저 좀 데리러 와주실래요?"라는 부탁을 쉽게 하기는 힘들다.
골프를 먼저 치자고 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차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사람에게 먼저 골프 치자고 말하기는 사실 좀 어렵다. 내가 차가 있고 그 사람을 데리러 갈 수 있는 경우야 상관이 없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우는 나와 이미 친한 사람이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등교 시간이 티오프 시간을 결정한다
차도 있고 언제든 골프장에 갈 수 있다고 친다면, 그다음 충족되어야 할 조건은 서로 비슷한 등하교 시간이다. 아이들의 등하교 시간이 티오프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스쿨버스를 혼자서 탈 수 있는 고학년 엄마의 경우 새벽에 티오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 등하교를 시키는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를 간 후에야 골프를 칠 수 있다.
또한 하교 시간은 9홀이냐, 18홀이냐를 결정한다. 골프 18홀을 치려면 적어도 네 시간은 걸리는데 아이 학교가 일찍 끝나는 경우는 홀을 돌다 말고 헐레벌떡 데리러 가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반면, 아이가 스쿨버스를 타거나 방과 후 수업까지 하는 경우는 18홀을 치고 나서도 여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나만 여유로우면 뭘 하나. 나와 같이 치는 멤버의 아이가 일찍 학교에서 오는 경우라면 덩달아 18홀을 못 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보통은 등하교 시간이 서로 맞고, 차가 자유로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치게 된다. 일부러 누군가를 배제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회원권, 언제든지 골프 칠 권리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골프 회원권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는 골프장이 몇 군데 있는데, 회원권을 사야 치고 싶을 때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칠 수 있다. 보통은 남편들도 원활한 회사 생활을 위해 골프를 많이 쳐서 가족 회원권을 끊는 경우가 많지만, 큰돈을 한 번에 지출하는 일이기 때문에 선뜻 끊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일단 끊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골프장의 회원권을 사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집과 가까운 곳의 골프장 회원권을 샀는데 나와 골프를 함께 칠 만한 사람들은 다른 골프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거나, 필요에 따라 남편이 원하는 골프장의 회원권을 샀는데 차가 없거나 아이들 등하교 시간 때문에 쉽게 갈 수 없는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가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회원권과 멤버가 충족되지 않으면 칠 수 없는 게 골프다. 참 애매하고 까다로운 운동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골프 쳐야 해?"
나와 지인들이 매번 라운딩 시간을 잡을 때마다 하는 말이다. 어떤 날은 학교가 일찍 끝나서, 어떤 날은 차가 안돼서, 그런 조건들을 맞추다 보면 내가 마치 골프를 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해서 골프를 치려고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우선은 인도에서 이 정도의 비용으로 네 시간 정도의 여가를 보낼 수 있는 활동은 골프가 유일하다. 그리고 골프장에서 초록초록한 숲을 보면서 걷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쓸데없는 생각이 사라진다. 만나서 밥 먹고 수다 떠는 것은 어쩔 땐 매우 에너지 소모적인 일인데 골프는 운동이니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인도의 봄은 짧고 이미 요즘 낮 기온은 30도 가까이 된다. 4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계절이 다가오기 전에 소중한 인연들과 이 좋은 계절을 충분히 즐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