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를 피해 떠난 여행
"인도에도 진짜 깨끗하고 공기가 맑은 곳이 있대. 이번 디왈리에 가보면 어떨까?"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인도 직원들에게 추천받은 여행지가 있다며 가보자고 했다. 얼마 전 자이푸르 여행의 고단함에 질려 당분간 인도 국내 여행은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나 공기가 맑다는 말에 솔깃했다. 힌두교 최대의 축제 디왈리(Diwali)가 있는 10월은 미세먼지가 각을 잡고 돌진해 오는 달이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뿌연 미세먼지로 아파트 앞동이 보이지 않는 것에 질려 버린 나는 일단은 이 델리를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된 우리 가족의 세 번째 인도 국내 여행. 미세먼지가 시작되는 10월이 되니 작년의 기억이 새록새록하여 1년이 넘어서야 써보는 아주 뒤늦은 여행 후기다.
우리가 여행할 그곳은 잠무 & 카슈미르(Jammu & Kashmir). 잠깐만, 그런데 그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다.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험 문제에 단골로 등장한 그 지역, 설마 내가 아는 그 카슈미르 분쟁 지역인가? 20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분쟁 중이라고? 갑자기 내 머릿속에는 총든 군인들과 오합지졸로 잡혀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그려졌다. 위험 지역 아니냐고 울상이 된 나에게 남편은 우리가 가는 곳은 분쟁 지역에서 떨어진 안전한 곳이며 인도 사람들도 눈을 구경하러 많이 가는 관광지라고 안심시켰다.
잠무 & 카슈미르 지역에서도 우리가 가는 곳은 주도 스리나가르(Srinagar). 파키스탄 국경에 접해있는 곳이었다. 델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비행한 지 4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승무원이 방송을 한다.
"여러분! 지금 창문을 올리고 바깥을 보십시오!"
그 말에 창문 커버를 올리고 바라본 바깥 풍경은 믿을 수 없었다. 아직 비행기가 착륙한다고 방송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분명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중인데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 뾰족뾰족한 설산들이 보인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다른 인도인 승객들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구나. 히말라야 산맥은 바로 이 카슈미르 지역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나는 지금 그 시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파도가 밀려오는 듯 셀 수 없이 많은 설산에 압도된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와 있는 봉우리들은 제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앞서봤자 자연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비행기는 그저 조심하여 이 봉우리들을 지나갈 뿐이다. 이제 곧 도착하게 될 스리나가르에 대한 기대가 한껏 차올랐다.
스리나가르 공항에 내리니 분쟁 지역답게 과연 경비가 삼엄하다. 잠시나마 내가 상상 속에서 만나보았던 총든 그 군인들이 공항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다. 하지만 긴장감도 잠시, 마스크를 쓴 얼굴 위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한낮에는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더운 델리에 있다가 갑자기 겨울이 느껴지니 이곳이 북쪽 지방인 것이 실감 난다. 챙겨간 겨울 외투를 캐리어에서 꺼내 입고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총든 군인들은 좀 무서울지언정 이곳에 오길 잘했다 싶다. 아무렴 미세먼지가 더 무섭지.
공항 주차장에서 미리 섭외한 기사를 만났다. 우리의 목적지는 달(Dal) 호수. 공항을 빠져나온 차는 스리나가르 시내를 달린다. 놀랍게도 거리 곳곳의 큰 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한국은 지금쯤 단풍이 시작되고 있을 텐데 인도에서 단풍을 볼 수 있다니 난생처음 온 이곳에서 묘한 위로를 받는다.
달 호수에 간 이유는 시카라를 타기 위해서였다. 시카라는 엔진이 없이 오로지 노를 이용해서만 운전하는 보트로, 말하자면 인도판 곤돌라. 이탈리아의 곤돌라는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이곳은 바로 인구 강국 인도 아닌가. 인건비가 말할 수 없이 싸다. 그러나 바가지가 판을 치는 곳도 인도. 보트값을 잘 흥정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선착장에 도착하니 노꾼들이 달려든다. 나는 인도에서 FRRO를 지닌 거주 외국인의 긍지를 갖고 이에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그들이 외치는 금액을 들으니 역시나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고 있다. 우리는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 노꾼 앞에 섰다. 몇 번의 흥정이 오간 끝에 어른 셋 아이 하나가 한 시간 동안 보트 타는 비용으로 500루피를 지불했다. 이 정도면 바가지도 쓰지 않았고 시작이 좋다.
시카라는 생각보다 작고 날씬하게 생긴 배였다. 배를 타려고 발을 디디니 보트가 흔들흔들한다. 노꾼까지 포함해 어른 넷에 아이 하나면 너무 무거워서 가라앉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보트가 부드럽게 두둥실 나아간다. 생각보다 승선감이 좋다.
시카라는 마침내 호수 한가운데로 나왔다.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맞닿아 있는 하늘. 구름이 꼈지만 언뜻 고개를 내미는 하늘이 파랗다.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 시카라에는 어린이용 귀여운 노도 있었다. 아이가 신나서 노를 저어보겠다고 한다. 노꾼 할아버지는 친절하게 아이가 노 젓는 것을 도와준다.
조금 있으니 장사하는 배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인도 여행을 다닐 때 특히 장사꾼을 조심해야 한다. 인도 사람들은 정말 끈질기다. 밑도 끝도 없는 영업력을 발휘해 거의 강매 수준으로 물건을 팔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북부 지방이어서일까? 사람들이 약간은 차분하고 지나치게 말이 많지도 않다. 우리는 숯에 구워주는 막대 옥수수와 과일 플래터, 따끈한 짜이를 사 먹었다. 조용한 호수에는 노 젓는 소리, 우리가 떠드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달 호수를 한 바퀴 도니 연잎이 가득한 곳이 나온다. 시카라는 연잎을 헤치며 나아간다. 지금은 겨울을 향해 가는 계절이라 연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없지만 여름에 오면 볼 수 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어떨지 또 궁금해졌다.
약 두 시간의 보트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굴막(Gulmarg)에 가기 위해서였다. 굴막은 스리나가르에서 파키스탄이 있는 서쪽으로 약 한 시간 정도 가야 하는 곳으로, 해발 약 2,650m에 있는 고지대 도시이다. 인도 사람들은 스키를 타러 가는 곳이고, 스키를 타지 않더라도 해발 약 3,950m까지 올라가는 곤돌라를 탈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스키와 보드를 타기 위해 장비를 이고 지고 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