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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Apr 11. 2024

탕후루처럼 통통 튀는 너의 상상력

수호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교사와 아이도 서로 통하는 코드가 있다.

※ 글 속에 등장하는 모든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열두 살 아이의 눈이 이렇게 무감할 수가 있나?'

 수호의 눈빛은 사람으로 가득 찬 9호선(지옥철이라고도 하는)을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그것과 같았다. 그저 오늘이 시작되었기에 살아가는 회색빛의 분위기말이다. 아이를 감싸고 있는 무기력함과 무료함의 안개는 보고 있는 나조차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보통 내가 만나보았던 개성 있는 아이들의 경우 장난기가 가득하거나, 반항기가 있었기 때문에 짧은 경력의 나로서는 이 아이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리 반에는 21명의 아이가 있지만 (그리고 그 와중에는 수호보다 조금 더 사랑이 필요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첫날 나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건 바로 수호였다. 


 이래나 저래나 수호는 우리 반이었고, 나는 이 아이가 갖고 있는 무료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결과, 며칠간 나와 수호의 숨 막히는 탐색전이 이어졌다. 수호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는데, 종종 예상하지 못한 돌발행동을 하며 내가 그어놓은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해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런 탐색전 속에서 수호와 나의 관계는 후퇴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첫 출발선에서 앞으로 뒤로도 가지 않은 채.


 아이와 미묘한 긴장감이 확 풀려버린 건, 3월 3주 차의 미술 시간이었다. 5학년 미술 첫 단원이 '나'를 표현하는 단원이었는데 우리 반은 여기서 확장해서 나를 소개하고, 우리 모둠의 이름을 정하여 표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수호가 속한 2모둠은 이름을 정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수호의 참여가 부진해서 그런가 걱정하며 다가간 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 박수호 고집이 황소예요!" 

와우! 수호의 의견이 강해서 아직 모둠 이름이 못 정해지고 있었다니! 수업 시간에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은 처음이라 난 우선 수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었다. 

"수호야, 모둠 이름 뭐로 하고 싶어?"

최대한 따뜻해 보이는 목소리로 묻는 나의 질문에 수호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호날두조요."

"호날두? 왜?"

"..."

아이는 우물거리던 대답조차 멈추었고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수호의 마음속에는 12살 장난꾸러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땐 '쓰우~'거리며 호날두를 따라 하는 남학생들과 수호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좀 더 심오한 의미가 있을 거라 착각한 나는 모둠 아이들이 호날두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있도록 도왔다. 


 결국 2모둠은 남자아이들의 눈부신 활약(?) 덕에 호날두조가 되었다. 그 뒤에도 놀라운 발견은 이어졌는데, 모둠 이름을 꾸미며 호날두를 그리는 수호의 그림 실력이었다. 5학년 답지 않은 동세 표현과 섬세한 스케치 실력은 나와 아이들의 입에서 연신 오오~ 소리가 나오도록 하였다. 귀가 발그레해진 채로 열심히 그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던 나는 내가 계속 머무는 게 아이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다른 모둠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미술 시간에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모둠의 작품을 하나하나 걸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쫑알대는 아이들 옆에 슥하고 나타난 수호.

"선생님, 완성했어요."

좀처럼 내 옆에 오는 일이 없던 아이가 자진해서 작품을 가지고 온 것이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뒤섞인 표정을 하며 수호가 내민 작품은 근사했다.

"우와 수호야. 호날두가 경기장에서 뛰면서 세리머니 하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둔 것 같아. 네 덕분에 2모둠 이름표가 더 멋있어졌다. 정말 근사하다."

진심을 담아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듬뿍 퍼주었다.

".. 네.. 감사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이 황당하여있던 아이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들어가는 발걸음에서 호핑스텝이 느껴진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날 이후부터 보드게임 '달무티'의 카드로 친구들에게 타로를 봐주겠다든지, 친구들을 닮은 캐릭터를 그려 선물한다던지. 부쩍 귀엽고 발랄해진 수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혼날까 봐 담임인 내 눈치를 보던 수호도 매번 웃으며 동참해 주는 담임의 철없는 모습에 이젠 당당히 나를 부르며 자신의 재미난 장난에 나를 초대한다.



"선생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젓가락에 포도를 옹기종기 꽂은 채 씩 웃고 있는 수호의 얼굴이 보였다. 

"탕후루예요."

알록달록 예쁘게도 꽂아 놓은 탕후루.

수호의 말을 듣고 보니 탱글탱글한 모습이 탕후루 같기도 하다.

"수호야 너무 재밌다. 왜 이렇게 탱글탱글해! 설탕 코팅한 거 아냐? 선생님 사진 찍어도 돼?"

철없는 선생님은 또 그게 재밌다고 사진으로 남긴다. 

 작은 포도에서도 재미와 웃음을 주는 아이의 상상력. 그리고 그걸 적절히 드러내는 표현력. 나는 이것이 수호의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하던 아이는 이제 한 마디만 해도 반 아이들에게 빵빵 웃음을 선사하는 명예 개그맨이 되었다. 아이들도 수호 자신도 그런 변화를 즐거워하고 있다.


 물론 수호는 요즘도 종종 수업 시간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어려워하는 과목이나 글씨를 많이 쓰는 과목일 경우에 그러한데, 이런 모습이 밉지가 않다. 노력하려고 끙끙대는 그 나름의 애씀이 애잔하기도 하고, 수호가 다른 부분에서 멋지게 두각을 나타내니 분명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리라 믿는 나의 낙천적인 마음도 한 스푼 더해져서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아이와 나 사이에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싹이 트고 있다. 조금씩 보여주는 수호의 사랑스러움과 노력이 고맙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찾아갈 때까지 아이와 나의 행복한 발걸음이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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