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혼미한 상태’ 요즘을 설명할 때 그렇게 요약하고는 했다. 아주 끔찍하지는 않지만 드문드문 끔찍하고 명료하게 다음에 이어갈 이야기를 그리던 사고는 뭉근한 연기처럼 흩어져 다른 갈래로만 멋대로 퍼져 나갔다.
오랜만의 외출과 갑자기 얼어붙은 날씨를 감당한 푸념처럼 방금 잠깐은 아주 끔찍한 순간이 스쳐 지났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는, 요즘은, 그런 답답하고 뒷감당이 아득한 내 상태를 샅샅이 파헤쳐 화내고 절망하고 조소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기 쓰고 버텨서 소모하는 대신 취침 약을 털어 넣고 항불안제를 조금 더 먹고 잠을 청한다.
그러러고 결정한 뒤 약들을 삼키고 관성처럼 가스처럼 흩어진 의식이 집착스레 맴도는 텍스트를 잠들 때까지 멀거니 훑을 요량으로 누웠다. 활자 속 인물들이 오래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옛날 팝송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와, 십 년도 더 전에 읽던 비슷한 창작물에서도 통기타를 치던 인물이 이 노래를 학교에서 부르는 장면이 나왔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그 소설 속 낭만에 취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식으로 언급되던 노래들을 모아 플레이리스트로 주야장천 들어대면서도, 개중 취향이 아니라고 투덜거렸던 노래였다.
스무 살 넘게 살면 자연히 청춘이라고 부르고 그중에도 십 대 후반기를 보낸 시간은 쌓이기 마련이지만, 자기 경험과는 몇 차원쯤 건너뛴 별세계 같더라도 청춘을 연출하기 위한 미장센은 꽤나 일관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공들인 푸른 낭만 안에서는 이렇게 직관적이고 에둘러 은유하는 법 없는 선언과 약속이 대단할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촌스러운 통기타음에 허스키하게 끌어대는 보컬은 역시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연기처럼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소모되던 사고의 동력들이 이제껏 내 책임 바깥의 세계를 쓰는 데다 쉽게 열중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많이 다른 방식의 욕구였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수증기처럼 흐물 해 지기 전에도 이쪽으로는 방향키를 잡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던 것이다. 별로 알맹이 없고 뚜렷한 근황에 관한 것도 아니고 치열한 자기 복습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내가 지내는 요즘, 내가 하는 생각… 그것들을 아주 오래 여태껏 그랬듯 구태여 시시콜콜 떠들기는커녕 그럴 의미가 있나 싶어 도리어 의식적으로 줄이고 지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어쩌면 병증이든 형이상학적 차원의 자아의 발로로든 내가 나를 격렬하게 증오하거나 책망하는 상태를 최악으로 규정해 피하려고 요령껏 조절한다는 것이 진짜 나를 좀 더 제대로 면밀히 살펴보는 것까지 미루는 쪽으로 헛디딘 건지도 모른다.
가끔 무언가 토해내야만, 그 토해낸 것이 그로테스크하거나 공격적이거나 자멸적이거나 하더라도 어쨌든 뱉어내야만 다음 것들이 나올 수 있는 시기가 온다. 그렇게 툭 튀어나오는 것들은 결국 아주, 집요하게… 내 것이다. 배설이나 비명.
그렇게 이끼처럼 막혀있던 내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고 나면 연기처럼 흩어져 스멀스멀 다른 곳으로 빨려나가던 사고와 에너지가 다시 제대로 뭉쳐지는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이 찌꺼기가 나올 때가 됐다는 것은 분명했다.
혼재된 연기 안갯속에서 문득, 우연히 마주친 김에 말해보자면 십 년 전체도 지금도 나는 그 클래식한- 속 편하고 단순한 통기타 솔로 노래가 별로더라. 오랜만에 뱉어낸 얘기가 좀 어이없을 정도로 시덥잖지. 이끼라는 게 그렇잖아.
조금 더 추가. 아, 내 얘기를 안 썼지? 써야 되나 보다, 하고 누웠는데 머리 위쪽에 차가운 충격이 휙 스며들었다. 정답을 알리는 계시 같은 거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머리맡 책장에 뒀던 자리끼 텀블러가 쓰러져 베개 위로 조금 새어버린 거였다. 그러나 대충 뭐 맞는 길이었다는 표시인 셈 치기로 했다. 초현실적… 그런 걸 믿어? 아니 그냥, 나로 서른 해 가까이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내가 미지의 존재라 가능성을 열어두는 거지. 웃기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