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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핀란드 여행법

집 없이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게으른 기록자
여행, 낭만에 취하다

핀란드에 가야지! 결심하고, 항공권을 사자마자 제일 먼저 한 건 에어비앤비로 지낼 곳을 알아보는 거였다. 예쁜 곳, 도심과 가깝되 한적한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알록달록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숙소들을 보고 있자니 북유럽 디자인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구나 실감했다. 넋을 잃고 스크롤을 내리면서 빛 잘 들고 안락한 그 공간에 자연스레 내가 녹아들면 기분이 어떨지 상상했다.


에어비앤비_헬싱키_캡처.png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헬싱키 숙소들 (출처: airbnb.co.kr)


현실은...

하지만 제한된 예산의 대부분을 숙박비로 탕진할 순 없었다. 유럽의 높은 물가를 감안하면 줄일 수 있는 건 최대한 줄여야 했다. 2박 3일 짧게 치고 빠지는 여행이 아닌, 한 달이나마 진짜 살아보는 여행을 하기 위해선 숙박비를 아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식비 0원!의 비결

고민과 조사를 거듭한 결과, 나는 핀란드에 도착하고 처음 이틀(에어비앤비 이용), 여행 기간 중 다른 나라로 여행 갔던 이틀(호스텔 이용)을 제외하고 약 3주 동안 무료로 먹고 자고 했다. 오늘은 내가 어떻게 숙박비와 식비를 아껴서 한 달 동안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적어보려 한다.


무료 숙식의 대가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나는 하루에 5시간, 일주일에 5일을 일했다. 이미 여행 좀 한다 하는 사람은 다 아는 워크어웨이를 한 것이다.


Workaway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host)과 봉사자(workawayer)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정확히는 연결(연락)은 내가 하는 것이고, 사이트는 호스트의 정보를 제공해 준다. 호스트는 대부분 일손을 필요로 하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노동의 대가로 숙식(+a)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workaway_photocontest_capture.png 워크어웨이어들의 사진 콘테스트 수상작 (출처: workaway.info)


가입 없이도 호스트 목록을 볼 수 있지만, 호스트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소정의 비용(1년에 29불)을 내고 워크어웨이어(workawayer)로 등록해야 한다(엄밀히 말하면 3만 원에 숙식비를 해결했다고 해야겠다). 호스트의 국적과 요구사항은 다양하지만, 주로 농장이나 호스텔에서 일손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워크어웨이어는 프로필에 방문 예정 국가와 일정, 할 수 있는 일, 사용 가능한 언어 등을 공개할 수 있다. 호스트가 프로필을 보고 연락을 줄 수도 있지만, 워크어웨이어가 호스트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는 총 네 군데에 메시지를 보냈고, 두 군데에서 와도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첫 번째 집

처음으로 일했던 곳은 핀란드의 로망 즉, 숲과 오두막이라는 요소를 갖춘 여름 게스트하우스(Summer Lodge)였다. 헬싱키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포르보(Porvoo)라는 오래되고 아기자기한 도시에 위치해 있다.


2016-08-16 229.JPG 포르보에서 2주 간 일했던 곳 ⓒ게으른 기록자


이곳에서 2주 간 있었는데, 나의 역할은 하우스 키핑, 즉 객실 관리였다. 손님에게 방을 안내하고,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퇴실 시간이 지나면 방과 공용공간을 청소하고, 침구를 세탁하고, 널고, 개고, 다시 씌우는 일까지. 집에서도 잘 안 하던 일을 타지에서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지만, 육체노동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나는 빨래하는 걸 좋아해서 즐거웠고, 호스트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그녀는 대체 왜 남자 워크어웨이어들은 빨래를 착착 개지 못하냐며 분통 터져했다. 각잡기 좋아하는 한국 군필자들 가면 아주 좋아할 듯). 하지만 이불에 시트를 씌우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나중엔 익숙해졌지만) 앞으로는 나와 가족을 위한 게 아니면 절대 침구 정리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잠은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의 3.5층짜리 오두막 집에서 잤는데, 그 집에 호스트와 호스트의 남편, 호스트 부부의 갓난아이, 호스트의 고양이, 호스트의 부모님, 호스트 부모님의 개, 호스트 남편의 친구, 나 말고 다른 워크어웨이어 한 명이 같이 살았다. 덕분에 서울의 전형적인 핵가족에서 살던 내가 핀란드 전원에서 대가족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집

두 번째 집은 카우니아이넨(Kauniainen)이라는 헬싱키의 위성도시에 위치한 가정집이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을 있었고, 경제학자-방송작가 부부의 세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세 살짜리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말도 안 통하는 우리가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니 너무 신기하고 고마운 기회였다. 그 외에는 아침에 호스트가 첫째와 둘째를 정신없이 먹이고 입혀서 데리고 나가면 어질러진 집안을 정돈하는 일 정도. 근데 집이 너무 예쁘고 깨끗해서 청소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2016-08-16 741.JPG 카우니아이넨에서 일주일 살았던 곳 ⓒ게으른 기록자


일 안 하는 시간을 활용해서 헬싱키 시내 구경을 다녔는데, 기차로 20분 걸리는 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핀란드에서 통근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다. 쓰다 보니 다시 가고 싶네. 아무튼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핀란드 양육 문화를 가까이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막내 아이가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면 스웨덴어를 몰라서(이 가족은 스웨덴어권의 핀란드인이다) 영어와 독일어의 발음을 섞어 엉터리로 읽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까르르 웃어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워크어웨이의 좋은 점

워크어웨이는 숙식비 해결보다 더 좋은 장점이 있다. 바로 현지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호스트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내게는 문화체험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대체로 돈 내고 숙박 시설에서 묵었을 때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한 예로, 첫 번째 집에서는 식재료만 제공해주는 형태라 밥은 직접 해 먹었어야 했다. 함께 장을 보러 갔는데, 장 보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미국이나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언어를 몰라도 직관적으로 대충 고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처음 보는 물건도 많고, 용기나 포장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뭐가 뭔지 알기가 어려웠다. 그건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식재료와 조미료가 아무리 많아도 딱 봤을 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재료로 하는 요리는 또 나름의 재미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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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집에서는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또 식사 준비와 마무리를 함께하면서 그들의 식사예절이나 조리법 등을 알게 되었다. 아, 핀란드의 주방에서 가장 부러웠던 건 독특한 찬장이다. 개수대 위의 찬장이 아래가 뚫려있는 구조라 설거지를 하고 바로 접시를 올려놓을 수가 있다! 말하자면 찬장 겸 건조대인 것. 도입이 시급하다. (참고: 관련기사)


워크어웨이, 고려해야 할 점

그럼에도 워크어웨이를 하기 전에 꼭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정해진 시간만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여행보다는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는 점이다. 하지만 하루에 5시간만 일하고, 5일 일하면 이틀을 쉴 수 있으므로 호스트와 논의하여 스케줄을 잘 조정하면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 게다가 현지인의 조언이나 도움을 받으면 여행이 한결 쉬워지기도 하니까.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호스트를 잘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다행히 둘 다 좋은 호스트를 만났는데,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는 예전에 안 좋은 호스트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일은 엄청 시키는데 밥은 부실하게 주고 관리를 잘 안 해줬다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므로 사전에 호스트와 많은 대화를 통해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해두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그래서 결론은, 집 없이도 살 수 있겠더라

워크어웨이를 통해 나는 숙식비를 거의 들이지 않고 여행할 수 있었고, 호스트와 함께 살면서 일반 여행자로서는 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 내가 보낸 시간과 흘린 땀이 집이 되고, 밥이 되고, 친구가 되는 마법 같은 기적을 보았다. 언제라도 핀란드에 다시 간다면 묵어갈 수 있는 집도 생겼다.


이 여행을 통해 집이 없어도 어디서든 먹고살 수는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써의 집에 대한 걱정은 큰 걱정거리 중 하나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지만, 부동산 즉, 재산으로써의 집 걱정은 꼭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워크어웨이어로 등록하고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장기간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나는 다시 워크어웨이를 할 것이다. 그때는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참고: 워크어웨이에 관심 있는 당신이 궁금해할지도 모르는 서비스

헬프엑스(helpX): 워크어웨이와 유사함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 워크어웨이, 헬프엑스와 유사하지만 대부분 농장일에 국한됨

마인드마이하우스(MindMyHouse):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집을 돌봐주고 숙(식)을 제공 받음

카우치서핑(CouchSurfing): 일종의 숙소 품앗이. 호스트가 서퍼(Surfer)에게 남는 소파/침대를 빌려줌

오페어(Au-pair): 아이들을 돌봐주고 숙식과 일정의 급여를 받을 수 있음. 중개업체를 통해 구할 수 있음




스물여덟, 잠시 쉬어가도 될까?

핀란드에서 살며, 일하며, 여행했던 한 여자의 방황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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