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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처음 만난 핀란드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by 게으른 기록자

@Villa Chili, 핀란드


아침. 호스트 아가가 칭얼대는 소리에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서울에서부터 최근 몇 주를 유럽 시간대로 살았던 터라 피곤했음에도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이곳의 날씨는 몇 년 전 여름에 갔었던 호주(당시 그곳은 초겨울)와 비슷하다. 공기가 차고, 건조하다. 목이 칼칼하고, 열이 나는 듯하다.


어제는 정말 긴 하루였다. 밤을 꼴딱 새우고, 비행시간을 포함하여 20시간을 넘게 이동했으니. 게다가 공항에서 숙소로 찾아가야 하는데 유럽 여행을 위해 구입한 유심이 작동이 안 돼서(M유심 쓰지 마세요) 하마터면 오자마자 길을 잃을 뻔했다. 늦은 시간에 추위와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씩씩하게 캐리어를 끌었다.


표 사기도 쉽지 않았던 핀란드 기차 안에서. ⓒ게으른기록자


하지만 지도도 사진도 없이 글(영어)로만 설명된 숙소를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나는 지도도 잘 못 보고 방향치이니 어쩌면 상관없는 문제일지도..). 역 앞의 카페 겸 펍에 가서 길을 물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줬다. 하지만 혹시라도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도 모른다는 느낌적인 느낌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알려준 대로 쭉- 걸어가다 보니 왼쪽에 작은 숲이 나타난다. 핀란드에 아무리 숲이 많기로서야 이렇게 우리나라에 뒷동산 있듯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건 줄은 몰랐다. 감탄하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하며 드르륵 드르륵 캐리어를 끈다.


Ruusukvartsinkatu라는 길고도 어려운 길까지는 잘 찾아왔는데,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마을에서 어떻게 집을 찾아가지?라고 절망에 빠지려던 그 순간!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큰 개 두 마리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말을 걸까 말까- 순간적으로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했다. 우선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숲 너머로 에어비앤비 숙소가 위치한 마을이 보인다. ⓒ게으른기록자


사실 숙소가 이 마을 안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저 야심한 시간에 낯선 동네에서, 그것도 춥고 무거운 몸으로 필요 이상으로 헤매고 싶지 않았을 뿐. 그 아주머니에게서도 빠른 길 혹은 확실한 방향 정도만을 기대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선뜻 집을 같이 찾아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핀란드가 안전한 나라라고 해도
멀리서 온 네가 밤늦게 혼자 다니게 둘 순 없어.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걱정과 호의라니. 그때 누군가 날 보았다면 아마 찡그린 채 웃고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안도, 그리고 낯선 이를 대할 때 나오는 특유의 어색한 웃음이 동시에 드러나서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드디어 누군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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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야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지만, 이곳은 오히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무서워져 버렸던 것이다.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어쩌지, 하고. 그리고 그 '무슨 일'이라는 게 어떤 양상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낯선 곳에서 두려움은 배가 된다.


아주머니는 내가 집 앞에 도착해서 현관에 오르는 것 까지 보고 나서야 늠름한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홀연 사라졌다. 타지에서 만나는 이런 '적극적인 도움'은 꽤나 드라마틱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라면 안심해도 될 것 같다고.




스물여덟, 잠시 쉬어가도 될까?

핀란드에서 살며, 일하며, 여행했던 한 여자의 방황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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