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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기록자 Nov 12. 2019

그 연애 후 그녀가 잃은 것들

부디 아름답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 첫 문장이다. (...) 잘 사랑하고 잘 헤어지는 사랑의 판타지를 시에서 대리 체험했다. 애정이 식으면 끝.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사랑의 감정만 순수 기억으로 간직하는 관계의 단정함을 동경했다. 그 후 십 년쯤 흐르고서야 알았다. 사랑이 하도 구차하고 비루하여 저런 담담하고 매끄러운 시가 나왔구나. -53p, <쓰기의 말들> by 은유


그와 헤어진 지 1년이 지나고서도 그녀는 종종, ‘잘 지내니'로 시작되는 연락을 받았다.


그와 그녀는 사랑했다. 불 같은 기질의 소유자들답게 열렬히 사랑하고 매섭게 싸웠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던 그 연애는 1년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세상에서 홀로 서느라 몹시 지친 상태였다.


어느 날 그녀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우연히 알게 된 대선배님과 술을 거나하게 먹고 있었다는 걸 아는 그녀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흉흉한 세상, 가는 인연의 끈으로 꼬드겨서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의 꾐에 빠진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취기와 울음으로 가득한 그와의 통화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무렵 그는 술을 많이 마셨고, 자주 울었고, 자꾸만 죽겠다고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가 나쁜 맘을 먹지 못하도록 가서 말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처해있는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더 크게 상심했다.  


술에 취한 그는 난폭했고, 그 마음속의 울분은 종종 그녀에게로 향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네가 뭘 아는데!


그녀에겐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추운 밤, 찻길로, 옥상으로 향하는 그의 빠른 발걸음을 쫓아가는 건 힘들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니란 걸. 생에 간절함이 있기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거란 걸. 그래서 그녀는 다른 날 새벽 또다시 술 취한 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왔다. 소리를 지르고, 대문을 두드리고, 도어락을 풀려고 번호키를 눌러댔다.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그의 앞길을 막는 게 두려워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을 놓을 듯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력했다.


말할 것도 없이 둘은 얼마 후 헤어졌다.

그녀는 오래 쓰던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전화, 문자, 메신저, 음성사서함으로 쏟아지는 연락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즐겨하던 SNS도 불안요소가 됐다. 댓글이 달리는 것도 싫고, 일상이 노출되는 것도 두려웠다. 비공개로 전환한 계정으로는 자꾸만 팔로우 요청이 들어왔다. 차단하면 다른 계정으로, 차단하면 또 다른 계정으로. 모든 계정이 다 수상해 보일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결국 SNS를 포기했다.

다니던 학원도 그만두었다. 불쑥 찾아올까 봐. 아예 잠시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친구들도 멀리하게 되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일상을, 자유를 잃었다.


그즈음이었다. 헤어질 무렵부터 피부 곳곳에 이상이 생기던 것이 점점 더 심해졌다. 피부과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아토피인 것 같다고도 했고, 피부염인 것 같다고도 했다. 약을 잔뜩 주고 잘 쉬라고만했다.

피부 다음에는 폐에,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이 화를 부르고, 화가 병을 부르는 형국이었다. 약이 부작용을 낳으면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약을 먹어야 했다. 몸과 맘은 한도 끝도 없이 약해지고, 예민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결국 그녀는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고민 끝에 찾아간 상담 센터에서 간단한 검사와 짧은 면담 뒤 상담사가 말했다.


잘 버텨오셨네요.


그리고 그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고 했다. 지금의 불안, 우울감, 무력감은 다 거기서 시작된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절대로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 못하게 할 거라고. 공개적으로 SNS는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불안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 생각했다.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은 사랑했던 기억마저 모조리 지워버린다.




여전히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절대 아는척하지 말아 주길.

내가 네가 어려운 일 다 잘 극복하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길 바라는 만큼 너도 이젠 내 생활을 존중해주길.

부디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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