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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김 Apr 11. 2020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10 April 2020 @백뻘게

만약 지금 현재 상황 - 코로나가 전세계를 뒤엎고 있는 - 에서 죽음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면,  

너무도 갑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살다가 그게 언제일지 알게 된다면, 

게다가 감사하게도, 생을 정리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순간에는 오히려 냉정해질 것 같다. 

비관하거나 부정하거나, 이 상황을 외면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먼저 차를 한 잔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고 할일들을 정리해 볼 것이다. 할일들이란 바로 다음과 같다. 


D-7 

먼저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고, 가격이 얼마든 결제한다. 그것이 이틀 후라고 가정해보자.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소식을 알린다. 남자친구에게도, 가장 최측근의 지인들에게도. 그들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테니 나의 죽음 또한 알린다. 아마 들으면 다들 막상 할말을 잃을 것이니 통화가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한국에 가서 연락하겠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베를린에서 살아온 2년의 삶을 정리한다. 지금은 관청이 열지 않으니 메일을 보내놓고, 압멜덴을 할 수 있도록 대리인을 신청해놓는다. 집계약을 정리하고, 라디오 수신료와 보험을 끊고, 은행 콘토를 닫는다. 

학교에 등록을 취소하는 메일을 보낸다. (등록한 지 일주일밖에 안되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등록금 내지 말걸) 비록 수업이 시작된지 첫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교수님들께도 따로 메일을 보낸다. 

여기서 만났고,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에게도 연락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미룬다. 지금 여기 상황도 아수라장이니까... 굳이 더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 

날마다 잠들기 전 브런치에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일단은 비공개로 쓰고 마지막 순간에 공개로 돌릴지 말지 결정할 것이다. 


D-6

새벽에 일어나서 공원으로 나가 한바퀴를 가볍게 뛴다. 집으로 돌아와서 남은 재료들을 최대한 활용해 먹고싶었던 음식을 삼시세끼 요리해먹는다. 냉장고를 비워야 할테니까. 집 전체를 깨끗이 청소한다. 함께 살던 친구가 다시 돌아왔을 때 문제가 없도록. 복도 한 켠에 놓여있던 거울도 쓰레기로 내놓는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 알렉산더 플라츠에 있는 dm에 가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구매한 후 집에 돌아와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한 짐을 싼다. 필요없는 것들이나 옷가지들은 버리고, 추억이 담겨있거나 소중한 것들만 챙긴다. 격리기간 동안 필요할 것들도. 

모든 짐을 챙기고 나면 지인들에게 하고싶었던 이야기들을 편지로 쓴다. 우표를 대량으로 구입해놓길 잘했다.

다음날 오후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하므로 그 전에 편지들을 부칠 것이다. 


D-5

그동안 키웠던 화분들을 zum Verschenken으로 내놓는다. 한 두개가 아니라서 엄청 힘들 듯... 

아침을 먹은 후 밖에 나가 자전거를 타고 슈프레강을 따라 베를린을 한바퀴 돈다. 

우체국에 가서 우체통에 편지들을 넣는다. 이 편지들은 아마 내가 죽은 뒤에야 도착할 것이다.  

3시간 전 테겔공항으로 향한다. 베를린 - 프랑크푸르트 - 한국행 루트의 비행기를 탄다. 약 13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의 일주일 중 거의 하루를 버린다. 새삼 독일과 한국간의 거리를 실감한다. 젠장...

비행기 안은 삭막하겠지만 아마도 그걸 살필 여유따윈 없을 것이다. 심란함이 그때서야 몰려올 것 같으니까. 

최대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지않고 답답함을 이기려 애쓸 것이다. 어차피 5일 뒤면 죽는데 이런 신경을 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내 주변을 위해서니까.  


D-4

공항에 도착해 검사를 받는다. 만약 양성이 나와 격리가 되면 더이상의 선택권이 없다. 격리된 채 죽을 수밖에.

하지만 음성이 나온다면 집으로 가서 자가격리를 시작하겠지. 아마도 자가격리를 하다 죽겠지만. 어쩌면 죽는 순간에도 혼자 있어야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처연해진다. 

아마도 남자친구가 데리러 나올 것 같다.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못 만날 테니... 그래도 보다 완벽한 격리를 위해 차 시트에 비닐을 씌우라고 하고, 나는 뒷자석에 탈 것이다. 집에 도착해 빠르게 격리 공간으로 이동한다. 화장실이 딸려있는 안방이다. 부모님께 이야기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짐 정리를 한 후 준비되어 있던 알코올로 모든 짐을 소독한다. 갑자기 죽는 것도 서러운데 코로나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이 놈의 맥주바이러스...


D-3

간만에 엄마가 요리해주는 집밥을 먹으면 한국에 온 실감이 날 것 같다. 방 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좀 어색하긴 하겠지만... 안방에서 유리 창문 너머로 베란다에 나온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다. 베란다 너머로 집 앞 풍경을 보면 익숙함에 안도하다가도 지금 상황을 다시 인지하면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지난 겨울부터 계속 미루고 못했던 뜨개질을 마저 한다. 나는 양말을 뜨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물로 남길까 한다. 베를린에서 선물로 가져온 것들은 전날 소독해 놓았으므로 가족들에게 대신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우스파티(앱)로 친한 친구들, 지인들과 연락을 한다. 그냥 전화보다 얼굴을 보고싶을테니까. 남자친구와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창밖에서 인사를 한다. 진짜 이게 무슨 생이별이냐. 쓰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다.


D-2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는다. 그때까지 증상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맘대로 아무 증상이 없다고 긍정적인 상황으로 예측해본다. 죽기 전인데 이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검사결과는 내일 오전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전염이 될지 여부를 알 수 있어 다행이다. 나야 낼 모레 죽으니 상관없지만 죽고 남기는 게 바이러스라면 그 무슨 민폐인가. 


D-1

다행히도 결과는 음성. (그래야 좀 덜 비극적일 것 같아서.)

 그리고 왠지 나는 안 걸릴 것 같다. (이 근자감으로 지금까지 베를린에 남아있다) 

하지만 자가격리는 14일을 지켜야할 테니 비극은 여전히 비극이다. 

음성기념으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가족들은 이 식사를 한 뒤 다음 2주를 자가격리를 할 것이다. 

최대한 밝게, 그리고 즐겁게, 먹고 싶었던 한식을 먹으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아마도 내가 매번 한국에 갈 때마다 그러셨던 것처럼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종류별로 차려놓으실 것이다. 생각하니 먹고 싶어지네... 회랑 쭈꾸미랑 전복이랑 과메기랑 떡볶이랑 족발이랑...... 

잠들기 직전,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이 들어있는 계좌의 카드와 함께 전에 미리 써두었던 유서와 편지를 서랍에 넣어두고, 동생에게 문자로 알려둔다. SNS에 마지막 인사를 남긴다. 브런치에 썼던 일기들을 수정한 후 공개설정한다. 잠시 집 앞 공터에 나가 남자친구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그 역시 자가격리에 들어갈 것이다... 이 망할 코로나


D데이에 정확히 몇시에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고통스럽지 않게 빨리 끝나길 바래본다. 

이상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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