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선명한
한국 시각으로 3월 22일 새벽 3시,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독일 시각으로 밤 열한 시가 되어갈 때쯤 엄마에게 연락을 받았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했다. 엄마는 열차 안이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도착해서 가능하면 연락달라고 했지만 아마 정신이 없으실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두서없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아주 많으셨다. 아흔이 훌쩍 넘어서까지도 스스로 걷고 읽고 말하고 외우고 먹고 모든 활동이 가능하셨고, 늘 정갈한 옷차림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계셨다. 그랬던 외할아버지가 더이상 스스로 걷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은 백신 3차 접종 이후였다. 연세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렇게 정정하셨던 분이 갑자기 쇠약해지는 것이 이렇게 순식간일줄은 몰랐다. 마지막으로 뵈러 갔을 때에도 스스로 몸을 일으켜 앉으실 수 있으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손 잡아드리고 다리도 좀더 주물러드릴 걸. 더 옆에 오래 앉아있을 걸...
물론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점점 약해지시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역시 곧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셨던 듯 유언장과 유산정리를 서두르셨다. 그동안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셨던 자개장롱을 열고 외할머니의 물품들을 나눠주셨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나신 후에는 조금 지루하셨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의 외할아버지는 왠지 지쳐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신만은 멀쩡하셔서 손을 꼭 붙잡고는 언제 다시 독일로 돌아가냐고 물으셨다. 거기가 좋냐고, 좋으면 거기서 살으라고. 따뜻한 손을 꼭 쥐면서 나는 올해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야 한다고 했다. 항상 응, 알았다고 하시던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 잘 안들리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확신이 없으셨던 것일 수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던 첫째 손녀딸을 늘 자랑스러워하시고, 항상 챙겨주시고, 많이 표현해주셨던 할아버지. 만나뵐 때마다 은행봉투 겉면에 꼭 '할아버지의 작은 마음'이라고 직접 편지를 써서는 용돈이라고 꽉 쥐어주시던 그 손아귀 힘이 여전히 선명한데. 그 손을 다시는 잡아볼 수가 없구나. 심지어 마지막 길에 함께 해드릴 수도 없구나...
지금쯤 그토록 보고 싶어하셨던 외할머니를 만나셨을까. 외할머니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을텐데.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으니까 벌써 한참 전이다. 너무나도 그리워하셨으니, 분명 두 분은 다시 만나셨을 것이다. 하늘에서 더할나위없이 행복해하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많이 슬퍼하진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