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5
지난 겨울 한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친구와 고등학생인 친구딸과 함께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석하려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생수병에 든 물을 마신 친구가 딸에게 주고, 뒤이어 내게도 권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친구는 "그러니까 피부가 안 좋은거야"라고 말했다. '음...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난 물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긴 하다.
한참 전 서울에 살 때다.(아... 지금도 서울에 사는구나... 암튼) 함께 살던(사실은 내가 얹혀 살던) 친구가 인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는 인도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지저분하고 불편하지만 그나마 화장실이 있는 기차에 비해, 장거리 버스를 탈 때는 무조건 3-4시간 전부터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의심이 많은 나는 아니 그게 가능하냐라던가, 그러다 사람 죽겠네라던가 하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운명의 장난까지는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내가 인도 여행을 떠나게 됐다. 그곳에서 몸뚱이 만한 배낭을 메고 화장실을 가야하는 슬픔이라던가, 어딘가 다른 이름의 공간을 화장실화 해주어야 하는(건물 뒤, 풀숲, 사막의 바위 뒤 이런 곳들 말이다) 창의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배낭을 누구에게 믿고 맡길 수도 없고, 보편적 선함을 믿고 바깥에 두고 들어가고 싶지만 화장실에는 배낭을 내려놓을 공간도 없고, 내려놓을 만한 상태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좁디 좁은 기차 화장실에서 배낭과 내 몸을 동시에 집어 넣느라 낑낑대기도 하고, 절묘한 균형으로 일을 보다가 배낭과 함께 뒤로 넘어질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언제나 화장실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인도에서, 특히 여자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인도 다람살라에 살면서는 그래도 화장실이 사무실과 집에 안정적으로 있었으니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델리라도 한번 오가려하면 12시간씩 달리는 차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으레 몇 시간 전부터 물 섭취를 줄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12시간을 달려도 화장실을 들를 수 있는 기회는 한 두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달리는 다람살라-델리 구간의 버스에서 나는 멀미도 꽤나 자주 했기 때문에 물도 음식도 섭취 자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도 생활 초기에는 주로 생수를 사먹었는데, 급속도로 늘어나는 빈 페트병을 보면서 느끼는 죄책감도 물을 적게 마시는 습관에 일조를 했다. 2년째부터인가는 정수기를 사서 물을 마시게 됐지만 여전히 충분히 마시는 습관은 생기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건 화장실을 갈 수 있는 한국과는 그래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페나 식당에도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꽤 있고, 화장지가 없는 경우는 꽤 많고, 집까지는 갈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물은 덜 먹고, 화장지는 늘 들고 다니는 생활을 6년 동안 했다.
피부가 좋지 않은 것이 물을 마시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물마시는 습관만은 잊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친구의 말 때문만은 아니라, 건강상태를 체크하러 들른 병원에서도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다고 충고를 들은 후, 매일 큰 물병으로 2-3차례 물을 마신다. 물을 많이 마시니 당연히 화장실도 자주 갈 수밖에. 그리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다시 인도와 다람살라,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아, 이제는 화장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라고. 또 생각한다. 대부분의 좋았던 일과 가끔 좋지 않았던 일, 이제는 모두 그립고 슬픈 모든 시간들. 그리고 다시 물 드링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