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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Jun 15. 2024

타르, 숭고하지만 추악한 거장의 추락

그 추락이 주는 주의와 질문들

타르. 그녀는 지휘 영역의 거장이다. 거장이 무엇일까. 알지만 익숙치 않은 그 단어의 뜻을 새삼 곱씹어본다. 어떤 영역에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인정받는 자.

기술적인 능력 외에도 끊임없이 자신이 더 완전해지기위해서, 혹은 더 발전하기 위해서 고찰하고 부딪히며 결국은 누구보다 깊은 통찰을 가지게 된 자. 타르는 그렇다면 거장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타르는 여성이며 성소수자다. 자신의 능력대로 인정받기에 핸디캡으로 작용될만한 특성을 가지고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입지를 가졌다.

영화의 초반, 그녀의 인터뷰 내용 중 말러의 5번 교향곡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지휘자로서 거장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으리라. 그녀는 음악(그리고 원 작곡자)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본인만의 해석과 의미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모두를 극한으로 끌어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하기 보다 그 이상을해내려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성실한 노력으로 실어 나르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 교향곡이 말러가 어린 연인을 위해 만들었고 대작으로 인정받지만, 동시에 그 사랑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타르 그녀의 마지막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결국 타르는 말러 교향곡을 지휘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러 교향곡을 위한 준비만이 아니라, 그녀만의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고심하기까지 한다. 즉 그녀는 그간의 작업에 있어서는 더욱 극한의 표현을 끌어올리기 위해 깊게 사유하고, 새로운 창작을 위해서 사투하는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사투는 숭고해 보이기까지하다.


그런데 그 과정은 동시에 위태로워 보인다. 그녀는 주변위 일상적 소리에까지도 크게 타격을 받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져있다. 불안과 압박감으로 “부정적으로 과도하게” 예민해진 감각들에 시달리며 작업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 스스로가 그녀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된 셈이다.

그녀의 불안함과 압박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녀 자신으로 인해 생겨버린 것이다. 그녀의 숭고한 움직임 뒤에는 이기적이고 지저분한 욕망이 따라다닌다. 그녀는 그녀를 경외하고 그녀와 함께하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을 고압적인 자세로 찍어누르거나 착취했다. 물론 그들 또한 그녀의 권력, 능력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 곁에 머무른다. 하지만 타르는 그들의 뜻대로 이용 “당해주지” 않고, 원하는 것을 주지도 않으며 다만 그들을 이용해 본인의 욕망을 채우고 안위를 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숭고하기에 더욱 추악했다.

그리고 그 추악함의 민낯이 하나둘씩 드러날때

결국 그 거장은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타르는 숭고하기에 더욱 추악했으나, 추악한 자에게 숭고함은결국은 공존할 수 없었다.


대학 수업 중 남학생과의 대화에서 그녀의 자기 중심적이고 고압적인 모습이 단면적으로 드러났다. 생각과 취향이 다소 논리적이지 않은 학생에 대하여, 타르는 자신의 논리를 설득하거나, 남학생 스스로가 본인의 생각이 편협된 것은 아닌지 질문을 갖게끔 만들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르는 이를 넘어 자신의 생각을 고압적인 자세로 그에게 주입시키려고 했다. 마치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고 자신의 권력으로 찍어누르면서까지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하는 그녀의 태도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권력으로 다른 이들을 착취했다. 과거 자신의 제자 크리스타에 대하여, 추측컨대 타르는 그녀의 성적 매력과 자신에 대한 충성을 누리고는 그녀가 본인 뜻대로 되지않자 괘씸한 마음으로 그녀를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버린다.

그리고 매니저 역할을 하는 프란체스카에 대하여도 그녀의 성적 매력, 노동력을 마음껏 누리고 정작 그녀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연주자 올가에 대해서도 타르는 비슷한 착취를 하려했으나 오히려 올가에 이용당하게 된다. 타르는 자신의 새로운 창작물에 진전이 없을 때 올가의 연주를 보며 본능적이고 야수같은 표현력에 전율했다. 그녀를 통해 영감과 열정을 얻고 그녀를 자신이 취하기 편한 무언가로-그간에 그녀가 해오던 방식대로- 만들어버리려 했으나, 올가는 타르의 뜻대로 이용당하지 않았다. 올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타르의 지위를 통해 이루어내고, 타르가 원하는 것은 가차없이 무시해버렸다. 즉 올가는 “정점에 서있는” 타르를 이용해버린 최초의 사람인 셈이다.


정점의 지위를 누리던 타르는 정점이었기에 더욱 더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 홀로 떠났던 여행에서 그녀는 마사지를 받기 위해 방문했다가 한 소녀를 픽하게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 구역질을 하는 타르. 타르는 그제야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지위, 능력으로 빚어진 막강한 권력으로 누군가를 ‘당연히’ 착취해왔던 자신을 느끼며 그것에 역겨움을 느낀 게 아닐까.


타르는 게임에 수록되는 음악을 지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음악에 지휘가 필요할까.

지휘가 여러 악기와 선율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깊은 클래식 음악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연주자들과 교감하며 리드하는 역할이라고 한다면, 사실 현대의 게임 음악에 지휘의 역할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게임은 다소 너무 캐쥬얼한 영역으로 생각하기에 생긴 짧은 생각일까. 지휘와 클래식의 영역은 고전적이며 고급 취향이라고 생각되기에 그 반대로 여겨지는 게임에는 지휘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걸까.

클래식을 숭고하고 의미있는 무엇으로서 경외하고, 게임을 단순 재미로 하는 가벼운 무엇으로서 경시하는 것도 고정관념인 것은 아닐까.


그녀가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 큰 계기는 그녀의 민낯이 sns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클래식의 거장이 결국 현대의 소셜 네트워크상 가벼운 소통들로 한순간에 무너졌다고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클래식이 고전적이고 숭고한 영역이며 게임과 소셜 네트워크가 마냥 가볍고 천박하다고 볼 수는 없다.


타르가 그 권력을 누리며 존재할 때 그녀의 삶은 숭고하지만 추악했다. 타르가 아무리 능력있고 그녀의 작업들이 고귀하다고 하여도,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당연히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사실은 타르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이유로든 권력이 부여되면 주변의 조력자들을 당연히 착취하기가 쉽다. 그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타르는 그 착취로 인하여 결국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말 또한 마냥 더 이상 숭고하지 않고 천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타르의 지휘 아래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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