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은 경지에 다다른 요기(yogi)들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하게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감각한다. 가령 붉은색을 보면 붉은색과 연관된 수많은 기억을 떠올린다. 만약 그대가 붉은색을 생각한다면 어제 먹은 딸기부터 그리스도의 성혈까지 그 모든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감각과 생각이 하나로 뭉쳐있기에 색상은 의미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표현이란 무엇이겠는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생각과 기억으로 채운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공(空) 사상이니 케노시스(Kenosis)니 하는 비움에 대한 가르침도 있지만 결국 일부 종교와 철학에서 다루는 특수한 가치가 되었다. 결국 '채움'이야말로 (진부하지만)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우리는 계속해서 온갖 것들로 스스로를 채우고 온갖 것들로 대화한다. 심지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것들 까지도 덫칠한다. 팔자 좋은 고양이가 보기에 이런 세상이 얼마나 이상할까?
김동욱 작가는 바쁜 세상에서 잠시 쉬어갈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붉고 텅 비어있는 것'이라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의 주제를 읽어본다. 무작정 채우고 꾸미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비어있듯 색채(마음)에도 공간을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딸기맛이 떠오르는 붉은색이 아니라 그냥 텅 비어있는 진짜 붉은색을 그리고 싶었던 것일까?
붉고 텅 비어있는 것
작가는 '스스로 밝히면서 더 환해지는 경험'을 작품에 담아내었다고 고백한다. 텅 비어있는 것과 밝히면서 환해지는 것이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밝히기 위해 광원(光源)을 놓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말을 들으니 어느 날 누군가 미니멀리즘과 명상을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오히려 불필요한 물건을 사는 일이 있었다며 내게 불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는 종종 비움을 추구하지만 정작 비우지 못하는 웃픈 상황이 많다. 텅 비어있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메시지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떠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거창한 진리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느꼈다. 작가는 이 모순을 붉은색과, 검은색, 푸른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텅 비어있음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냥 흰 캠버스를 보여주며 이것이 비어있노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색채로 그려낸 모순을 통해 비어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붉고 검은 것들의 리듬"
작품은 대게 붉은색 불꽃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인상을 준다. 동시에 타오르는 검은색은 마치 물과 같아서 불과 섞이지 않으면서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감정의 모순이 이런 것일까? 정 반대의 마음이 모순을 통해 공존하고 있다. 아우렐리우스황제도 열정을 다하고 찾아오는 공허함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실 감정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의 절반만을 사랑한다. 뒤늦게 찾아오는 아쉬움과 고독은 삶을 좀먹는 것이라 여긴다. 좋은 것만 기억하자며 안 좋은 추억은 알코올로 씻어내려고도 한다. 작가는 이렇게 외면받는 감정의 절반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모순은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본질의 세계에서 모순은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이다. 음과 양이 돌고 도는 것처럼 좋음과 싫음도 함께 있으면서도 섞이지 아니한다. 작가는 감정이 지닌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정답을 굳이 찾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 구입해야 한다면 미니멀리즘이 아니듯 감정의 모순도 외면하거나 정리하지 않고 단순히 모순 그대로 그려낼 뿐이다.
"잘려나간 조각들"
"지도력과 통제력"
작가는 짙은 검은색을 거친 질감으로 표현하며 더듬을 수 있을 정도의 어둠을 찬란하게 표현한다.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려는 SNS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어두운 모습을 더욱 짙게 그려낸다. '스스로 밝히면서 더 환해지는 경험'을 이야기하며 모순되게도 짙은 어둠을 그려낸 것을 보며 신화의 모든 첫 순간이 어둠에서 출발함을 기억했다. 어둠은 빛보다도 앞서 존재한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둠을 죽음과 연관시키며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모든 이들이 잠을 자며 쉬는 때가 바로 어두운 때(밤)이며 모든 이가 결국 돌아가는 것이 죽음 아니던가? 차별 없이 모든 존재를 낳아 주고받아주는 생명과 죽음이 같은 어둠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모순이 보여주는 어둠은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던가? 또한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삶의 어두운 면이 가르쳐주는 지혜가 얼마나 크던가?
"타오르고 남은 잿속에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누구나 모순된 감정과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지만 편향된 밝음을 강박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대화와 빛나는 순간을 늘어놓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빛나는 순간만을 추구하면 삶이 병들기 쉽다. 작가는 이러한 세상에서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상징과 색상을 사용하여 추상적이면서도 강렬한 표현으로 삶을 꾸미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진솔한 대화를 건넨다. 작품에서 불과 물이 공존하듯 삶에도 음양이 공존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순간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존재간의 진정한 대화도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와 동시에 작가가 이야기하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에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구도자가 아니더라도 외면했던 삶의 모순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누구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왜곡하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볼 때, 텅 비어있으면서도 찬란하게 삶을 밝히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볼 것이다. 불은 비워낼수록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