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담임 선생님께 검사를 맡아야 해서 일기장에 즐거웠던 이야기들을 썼다. 꽤 오랫동안 일기장 검사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만의 비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용돈을 모아 나만의 일기장을 샀다. 다짐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한동안 나 혼자만의 비밀인 양 다이어리를 채워갔지만, 항상 누군가 내 일기를 볼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불안감이 있었다.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비밀은 없다는. 비밀로 하고 싶거나, 비밀인 척하고 싶어 하는 것들만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부터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면서 스트레스가 같이 몰려왔다. 아버지는 돈이 없으니 대신 대출을 받아주면 안되겠냐고 연락해왔다. 그래서 은행에 알아봤더니 평점이 낮아서 안된다나 뭐라나. 술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은행원의 얘기를 그대로 전했더니, 2금융을 추천해주셨다. 마지못해 알겠다 대답했는데, 아버지는 내 속마음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했다.
아버지는 술자리에서 나와 담배를 물고는 한마디 하셨다.
아무리 바빠도 할머니 좀 찾아뵙고 그래라
한참 동안 불행한 인생사를 떠들어대다가 시작된 두 번째 이야기. 떠난 사람을 이제와 찾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버지가 위선을 떠는 것 같아 짜증이 나면서도, 집에 와서는 왜 여태 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술자리에서는 '정신분석학' 이야기가 오갔다. 자크 라캉과 프로이트의 철학을 떠들어대며 서로의 초자아를 비웃었다. 그러다 친구는 벼랑 끝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나는 ‘너는 그 정도로 힘든 인생을 살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말을 했다. 친구는 나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고, 그 모습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친구의 전투적인 일상이 언뜻 보였다.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게 연휴를 마치고 출근을 했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덤덤하다는 듯이 자신의 가난을 지껄이는데, 그 가난이 내게는 너무 풍요로워 보여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생각해보자. 그럼 나는 여전히 가난한가? 그리고 또 여전히 불행한가? 돌아보니 지금의 나는 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서, 그래서 괜히 짜증이 났다.
사무실에 올라오니 이유 모를 긴장감이 감돌고, 노트북은 말을 듣지 않고, 몸에 힘이 빠지면서 두통이 찾아왔다. 약국에 갔더니 처음 보는 약을 처방해주길래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약사를 바라봤다. 회사로 돌아와 약을 먹고, 친구와 담배를 피우며 가십거리를 떠들어대다가 나의 인생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은 처절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 고등학생 때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해보자, 하면서도 기타를 살 엄두는 나지 않았고, 어제보다 녹슬었을 내 성대를 두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아 노래방을 가지 않았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지금도 자려고 누우면 힘들었던 하루가 스쳐 지나가며 희미하게 할머니 냄새가 난다. 경찰차를 타고 면회 왔던 할머니가 떠올라 울컥하고, 어렸을 때 추앙받아 마땅했던 애늙은이의 감성이 이제는 당연한 게 되어버려서 별거 없는 어른이 됐다는 생각도 들고, 이러다 나도 할머니처럼 늙겠지, 생기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죽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친구는 내가 가을을 타는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