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의 죽음에 대해 입 다물어야 하는 이유
이상한 날 아이들이 구름 속에서 울부짖네.
눈부신 날 비둘기들이 배를 건져 올리네.
sioen, 성기완 - 'Strange Days' 中
나는 2014년 4월 15일, 102보충대로 입대했다. 두려움에 떨며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다음 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점호를 준비하는 도중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내방송이 울렸다.
"행정반에서 전파합니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 있는 훈련병 모두 행정반 앞으로 집합"
다들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특수보직이라도 맡기려는 줄 알았는지 수영 좀 한다 하는 이들이 모두 행정반 앞으로 찾아갔다. 나는 특별히 수영에 재능이 없어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당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 때문에 훈련병을 차출하려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다. 내게는 '학생들을 태우고 수학여행을 가던 배 한척이 침몰했다' 딱 그 한 문장의 사건이었다. 하루하루 숨 막히는 훈련이 전부일 뿐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공감하고 슬퍼할 여력이 없었다. 나를 포함한 훈련병 모두가 그러했다. 전역식을 마치고 위병소를 나오는 순간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 없었고, 전역 이후에도 한동안 마찬가지였다.
방송작가는, 아니 나는 남의 죽음에 무디다. 더 처절한 사고, 더 뼈아픈 사건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걸 알기 때문에 특정 사건을 취재하다 보면 '조금 더 사고가 컸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다만 유가족과 통화를 마치고 나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된다.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다만 내가 그 죽음에 일순간 감정이 동요하는 이유는, 취재 과정에서 죽은 이가 알고 보니 꿈꾸던 대학에 진학하기 몇 달 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죽은 이가 얼굴 한 번 볼 시간 없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그 부모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슴을 울리는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 이면에 숨어있던 사소하다면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멕시코 칸쿤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으로 몇 명이 죽든, 라오스에서 결핵으로 매년 몇 명이 죽든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자세히 전해주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 역시 내게 큰 의미가 없는 게 맞겠다만, 그날의 사고가 자꾸만 잊히지 않는 이유는 떠나간 이들의 무덤을 들쑤시며 부관참시하는 이들이 아직 남아있고, 그 목적이 추모에 있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진상 규명을 하라느니 누굴 처벌해야 한다느니 하는 싸움을 보고 있다 보니 다들 너무도 악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매년 반복되는 이 싸움이 세월호 참사의 이야기로 남아버려, 사건을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과연 제3자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 추모원을 찾아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놈인데, 내가 뭐라고 누굴 추모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평가할 놈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죽음에 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죽음에 관해서는 함부로 공감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다들 왜 입 다물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