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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Jun 28. 2023

회사에서 욕 먹어서 힘들어요

내가 그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일까?

  사실 나는 수다쟁이야.

  하고싶은 말이 아주 많아.


  정미진, 김소라 - 있잖아 누구씨 中


  최근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합류했다. 면접을 보고 당장에라도 나를 채용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하필 친한 선배의 부탁 때문에 투입 시기를 늦춰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서로 스케줄 조율이 되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을 봤던 프로그램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전에 내가 일했던 곳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인 얘기를 들었고, 자신들이 스케줄을 맞춰 테니 늦게라도 합류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합류하게 됐다. 그런데 아직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지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선배 중 한 명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계속 불편한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스케줄을 조율해 가면서까지 나를 불러줬다는 건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좋게 얘기해줬다는 건데, 전에 일했던 곳에서는 내가 그리 일머리가 있는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좋게 말해준 걸까?


  프로그램을 옮길 때마다 느끼는 게 하나 있다. 방송작가 일을 시작하고 만났던 첫 선배는


  "내가 이래서 남자작가 뽑지 말자고 했는데"


  라는 말을 했고, 그 선배가 나가고 다른 선배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남자작가는 네가 처음인데, 작가 중에 네가 제일 낫다."


  라고 말했다. 이후 다른 회사에서 유튜브 제작에 합류했을 때는, 너무 소심하다며 CP(책임 프로듀서)로부터 면박을 들었다. 보도국에서 일할 때는 똘똘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다음 프로그램에서는 대본이 너무 딱딱하다는 지적을 들었다. 그리고 3년 이상 함께했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누구보다 광대 노릇을 잘했다.


  이와 비슷하게 옛 연인은 내가 일을 마치고 회사 사람들과 술 마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회사 사람들이라고 하면 결국 방송작가인데, 대개 방송작가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내 외모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돌려가며 헛구역질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연인은 항상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처럼 나는 항상 같은데, 나에 대한 평가는 매번 달라진다. 언제나 달라지는 건 내가 속한 집단과 내가 처한 상황뿐이다. 그렇다면 매번 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이유가 나에게 있다고 보기 어려울 거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적인 평가'의 이유가 외부에 있다는 게 아니다. 순전히 평가가 매번 '달라지는' 이유가 외부에 있을 거라는 말이다.


  방송작가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과 내게 어울리는 것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건 내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일에 대한 지적뿐이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고 하면 결국 옷은 찢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옷이 찢어졌을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건 단 하나다. 가장 큰 문제는 옷을 찢은 게 아니라, 찢어질 걸 모르고 억지로 입으려 했다는 점이다. 선배나 상사의 지적에 자책할 거라면, 적어도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몇 번이고 옷을 찢어먹었다. 그리고 지금도, 혹시나 옷이 찢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나를 괜찮은 작가라고 얘기해줬을 그 선배는 내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알아본 게 아닐까 싶어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 선배가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밥이라도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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